[여의춘추-조용래] 이 땅의 여성·어머니들에게 고함

입력 2010-07-19 18:08


“집안일로부터의 소외를 은근히 즐겨온 한국 남편들의 태도는 시대착오적이다”

십여년 전 일흔여섯에 별세한 어머니는 혼인해 내리 딸 다섯을 낳았다. 그 뒤로 어렵사리 아들 둘을 뒀는데 내가 그중 둘째다. 어머니의 출산 의지가 없었다면 난 세상 구경도 못할 뻔했다.

요즘 여성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얘기지 싶다.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초저출산 국가가 아닌가. 그런데 어머니 세대는 애 낳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한국이 압축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어머니 같은 열심 덕분에 가능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을 했다. 특히 1960년대 중반 개발연대가 시작되면서 휴일이 따로 없는 세월이 이어졌다. 그 때문에 아버지들은 가족친화형일 수 없었다. 자녀의 입학·졸업·진학과 혼사, 이사, 친척 관계 등 집안 대소사는 자연스레 어머니들의 몫이었다.

한국만큼 집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 구분이 분명한 나라도 드물다. 보통 남편은 돈 버는 일을, 아내는 그 돈을 적재적소에 나눠 쓰는 일을 맡는다. 돈 배분 역할을 맡아보니 경제권은 당연히 아내 쪽으로 기울고 동시에 그에 따른 책임도 감당해야 했다.

자녀 교육과 진학문제는 물론 재산 불리기에 이르기까지 아내의 권한과 책임은 막중해졌다. 이른바 치맛바람의 탄생이다. 그 과정에서 남편들은 집안일로부터의 소외(?)를 은근히 즐겼다. 비겁한 노릇이었다. 남편 집단의 무책임, 돈 벌어오는 것으로 소임은 끝이라는 식의 가정 내 역할 방기는 그렇게 뿌리내렸다.

돈 버는 남편과 집안을 꾸려가는 아내라는 ‘개발연대형 집안일 역할 분담’은 시시비비를 떠나 한국 가정의 특징이었다. 우리 세대도 그 구도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어쩌면 요즘 젊은층들조차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을 터다. 보고 배운 게 그뿐이었으니.

문제는 개발연대형 집안일 분담이 지금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정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2000년을 전후로 크게 변했다. 바로 저출산과 고령사회 압력이다.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개발연대형 남편·아내 모델이 존폐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2006)에 따르면 2015년부터 25∼29세 신규취업연령인구보다 55∼59세 은퇴연령인구가 급격하게 늘기 시작한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은퇴와 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저출산이 겹쳐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머잖아 노동력인구의 감소도 예상된다.

고령화 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인구가 늘고 있다. 과거 압축성장은 베이비붐 세대의 충분한 노동력 덕분에 이른바 인구 보너스(bonus) 효과를 누렸지만 현재 진행 중인 급격한 고령화는 부양인구의 증가로 인한 인구 오너스(부담·onus)를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생산인구가 줄어들고 인구 오너스 현상이 팽만해지는 사회가 머잖아 우리가 직면할 모습이다. 이러한 난관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출산율을 높이고 노동력인구 감소를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다. 정년연장 등을 통한 고령인구의 취업 장려와 더불어 여성·어머니의 역할을 높여가야 한다.

고령인구 고용 장려는 노동력인구 감소를 저지하는 데 유효하지만 여성·어머니의 역할 확대는 그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출산율 저하의 원인으로 양육·교육비 부담을 흔히 꼽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성들의 인식의 변화에 있다. 여성들이 엄마 되기를 거부하면 그 어떤 대책이 나와도 무용지물이다.

우리나라 여성의 사회진출은 아직도 경쟁국들에 비하면 미약하다. 15∼64세의 고용률은 2009년 현재 5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77.2%를 크게 밑돈다. 아직은 여성의 경제활동이 작은 수준이지만 노동력인구 감소시대에 한국 여성들이 커버해 줄 수 있는 여력은 큰 셈이다.

물론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다. 그간 집안일을 사실상 방기해온 남편들의 전면적인 의식전환이 긴요하다. 이 땅의 여성·어머니들이여, 당장 개발연대형 집안일 모델을 깨부수기 바란다.

또 하나의 비겁한 남편들의 음모라고 비난 받을지라도 고(告)할 수밖에 없다. 여성과 어머니가 바로 서야 이 땅의 미래가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조용래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