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대원 (12) 88올림픽 앞두고 추방명령 ‘충격’

입력 2010-07-19 18:00


국제YWAM과의 연합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과 도전을 받은 것이다. 국내라는 지역적 한계에서 벗어나 해외로 나갈 수 있는 많은 기회를 갖게 됐다. 예수전도단은 최재선 선교사를 처음 해외에 파송하면서 열방을 향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국제 YWAM과 차이점이 있다면, 전도단은 단기보다는 장기 선교사를 기르는 데 초점을 둔 것이다. 이후 예수전도단은 제자훈련학교(DTS), 대학생제자훈련학교(UDTS), 성경연구학교(SBS) 등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성장해 갔다.



예수전도단 사역이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난 힘겨운 시련을 마주해야 했다. 1986년은 나와 가족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88올림픽을 앞둔 정부는 해외 선교사들이 거리에 많이 다니면 후진국가로 보인다며 선교사들의 활동을 원치 않았다. 급기야 정부는 나에게 한국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61년 이 땅에 발을 디딘 우린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한국에 머물고 싶었다. 그런 우리에게 정부의 추방명령은 너무나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무렵, 하나님께선 나에게 사인을 보내주셨다. 86년 1월이었다. 대만에서 열린 DTS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북미와 유럽에 있는 한국인 2세를 위해 일해야 한다. 이들 중 선교사로 부름 받은 이들이 많은데 그들을 일깨울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난 즉시 순종하지 못했다. 한국을 언젠가 떠나야 하겠지만 그때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제 나를 한국에서 옮기시려고 하는구나’ 하고 순순히 받아들였으면 좋았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내가 떠나지 않자 여러 가지 압력이 가해졌다. 경찰 관계자는 찾아와 “북한에서 당신을 죽이려 하니 미국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TV 방송에 대학생들의 데모하는 장면과 예수전도단의 집회장면이 함께 나가기도 했다. 우리가 정부에게 불편한 존재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86년 8월, 우리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을 갑자기 떠남에 괴롭고 슬펐다. 머릿속은 혼돈과 후회로 가득했다. 한국을 떠난 뒤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에 도착한 후 LA의 한 공동체에서 하루 6시간 이상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주님께 회개하는 데 여러 달의 시간을 보냈다. 2년이라는 기간 동안 공동체 안에서 상담도 받고 격려 받으며 회복되어갔다.

이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안다. 한국에서 우리를 떠나게 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돌이켜보면 그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너무 바쁘게 일해 왔다. 그 결과 ‘주님과 함께 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주님과 함께 일하는 시간은 주님의 임재를 기뻐하고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 시기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너무나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난 선교사로서 안주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 동안 난 약간의 칭찬을 받는 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주님은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나를 한국 밖으로 옮기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벽하셨다. 우리가 한국에 남아 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선교를 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한국의 디아스포라(해외교포) 사이에서 일하길 원하셨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줄 준비를 하고 계셨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