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기업 꿈꾸는 ‘일그러진 영웅’… ‘포항 엄석대’ 윤장혁씨의 새 삶

입력 2010-07-18 18:47


윤장혁(26)씨의 휴대전화는 3∼5분마다 울렸다. 지난 16일 오후 기자가 경북 포항에서 윤씨의 화물차를 얻어 타고 그의 거래처인 L백화점으로 함께 가는 길이었다. 윤씨는 배송업체 ‘파워라이프물류’를 운영하고 있다.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간다.” 전화를 끊은 윤씨는 “같이 일하는 아이들이 물건을 싣고 출발해야 하는데 제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더니 ‘언제 오느냐’고 재촉”이라며 멋쩍어했다.

잠시 후 백화점 지하 창고 앞에 차를 세운 윤씨는 기다리던 김정현(19)군과 함께 수북이 쌓인 상자들을 차에 옮겨 실었다. 쉴 틈이 없었다. 고객에게 배달하는 백화점 물류가 윤씨 수입의 60∼70%를 차지한다. 윤씨는 현재 한 달 평균 1300만원가량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김군은 “1년 정도 됐는데 처음에는 일이 서툴고, 성격이 거칠어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는데 좋은 분을 많이 만나면서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고 했다. 김군은 옛 서울소년원인 고봉정보통신중·고등학교 출신이다.

윤씨는 2008년 포항에서 사업을 시작한 뒤로 소년원 출신 청소년들을 채용하고 있다. 현재 직원 4명 가운데 김군을 비롯해 2명이 소년원 퇴소자다. 윤씨는 고봉학교 보호주사보 김형균씨에게 “새 삶을 살아보고 싶은 아이들, 어두운 과거에서 건질 수 있는 아이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해 추천받았다. 김씨는 윤씨의 소년원 시절 지도교사였다. 물건을 김군의 차에 실어 보낸 윤씨는 지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우리 학교에 엄석대가 있어요’=윤씨는 학창시절 남들보다 덩치가 커 주먹을 휘두르고 물건을 빼앗았다.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궁핍함을 모르고 자랐다. 다만 부모는 맞벌이를 했고, 화목하지 못했다. 집에 오면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1997년 처음 소년원에 갔다. 6개월 수용 처분을 받았다. 대구소년원(현 읍내정보통신학교)에서 김형균 선생님을 만났다. 김 선생님은 “네 나이에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했다. 받아들이지 못했다. 두 번째 소년원 생활을 마치고 나와서는 밤길에 싸우다 붙잡혔다. 본드를 흡입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대전소년원(현 원촌정보산업학교)으로 이송되는 차 안에서 김 선생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정신 차려라”고 했다.

1년 6개월 뒤인 2001년 한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수학 문제를 풀고 선생님에게 초콜릿을 받았다. 스스로 문제를 풀고 상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초콜릿을 손에 들고 멍하니 쳐다봤다. 다음 수업이 시작됐지만 책을 펼 생각도 못했다. 영문을 모르는 영어 선생님이 꾸짖더니 초콜릿을 빼앗아 교실 쓰레기통에 버렸다. 참을 수 없었다. 선생님을 밀치고 교실을 나갔다.

그날 이후 학생들의 영어 교과서를 모조리 빼앗았다. 학교 식당에서는 학생들이 밥을 먹지 못하도록 몰아냈다. 학생들이 검찰에 투서를 했다. 검찰청 홈페이지에 ‘우리 학교에 엄석대가 있어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엄석대는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힘으로 급우들을 괴롭히는 학생이었다. 소년원에 돌아갈 처지가 됐다. 주변 어른들의 탄원서 덕에 6개월 수용 처분에 그쳤다.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2002년 대구소년원에서 다시 만난 김 선생님은 “나이 들어서도 교도소 가서 며느리 얼굴 볼거냐”며 나무랐다. 김 선생님의 권유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2, 3일에 한 권씩 봤다. 일본 여성 변호사 오히라 미스요의 자서전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외톨이, 비행 청소년, 조직폭력배의 아내, 술집 종업원으로 살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인물이었다. 밤마다 이불을 덮고 숨죽여 울었다. 자신이 그렇게 미울 수 없었다.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일기를 쓰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미스요의 책을 읽고 쓴 소감문으로 소년원 내 독후감 대회에서 난생 처음 상을 받았다.

하지만 더 이상 받아주는 학교는 없었다. 나를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대구 소파수리 업체에서 영업사원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공장에서 어깨 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고객들의 소파를 직접 고쳐주고 부수입을 올렸다. 밤과 새벽에는 대리운전도 했다. 2004년 목돈 벌 생각으로 고기잡이배를 탔다. 추자도 바닷가를 배회할 때 한 노인은 “고깃배는 종착역에서 타는 건데 한창 때인 네가 왜 타려고 하느냐”며 “돌아가라”고 했었다. 선원들의 끝없는 폭력에 시달리다 18개월 만에 무일푼으로 도망쳐 나왔다.

◇회귀=“그 이후로 서울에서도 일해보고 일본에서 일본어도 공부하다 2008년 포항으로 돌아왔어요.” 지난 일을 털어놓은 윤씨는 곧 자신의 현재를 설명했다. 더 이상 과거를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윤씨는 “저도 새 삶을 결심하는 친구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진학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는 “이 사업을 남부럽지 않은 국제적 물류기업으로 키워보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글·사진=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