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신창호] 바르셀로나의 힘

입력 2010-07-18 17:17

남아공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스페인 축구대표팀 베스트11에는 FC바르셀로나 소속 선수가 7명이나 된다. 지금 바르셀로나는 이들 때문에 유명세를 타고 있다.



태양과 투우의 나라 스페인에서 바르셀로나는 그리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아니다. 중세 때부터 도시가 당해온 피해를 주민들은 아직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1930∼40년대 스페인은 내전에 휩싸였다. 바르셀로나 중심의 공화파가 집권하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은 내전을 일으켰다. 세계 도처의 민주주의자들이 공화파를 위해 전쟁에 참전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베르톨트 브레히트, 발터 벤야민, 파블로 네루다, 앙드레 말로 등도 포함됐다.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1977년까지 공포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탄압은 주로 카탈루냐와 바르셀로나, 바스크 지방에 집중됐다. 마드리드와 카스티야 지방은 프랑코 독재의 구심 노릇을 했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오래전부터 자유로운 도시인이었다. 르네상스와 상업 자본주의가 스페인에 처음 도래한 곳으로, 시민들은 16세기부터 줄기차게 공화정을 주창했다. 이들에게 프랑코 독재가 얼마나 큰 아픔이었는지는 어렵잖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바르셀로나인에게 마드리드-카스티야인들은 프랑코 독재에 동조한 한낱 ‘겁쟁이’로, 스페인 국기는 “40년간 독재자 앞에 납작 엎드렸던 비굴한 카를로스 국왕의 얼굴”로 받아들여졌다.

축구에서도 두 지역은 항상 ‘전쟁’처럼 맞붙었다. 독재시절 바르셀로나인들에게 마드리드와의 축구경기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숨죽인 분노를 발산하는 정치집회였다.

그런 바르셀로나인들이 월드컵 도전 80년 만에 자국 대표팀이 우승하자 시내 곳곳에 스페인 국기를 내걸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단 한 번의 이벤트였을 뿐 두 도시에 스며있는 스페인 근대사의 갈등은 계속될 것”이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던 양쪽이 미움을 접고 함께 미래를 헤쳐나갈 희망이 스페인 전체에 심어진 건 틀림없다. 이 희망 안에는 “더 좋은 결실은 피해자의 분노가 아니라 용서에 의해 생겨난다”는 진리가 들어 있다.

피해자였던 이 도시 시민들이 가해자와 방관자들을 진정 용서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바르셀로나의 힘’은 축구에서가 아니라 스페인 사회 전 영역에서 나타날 것이다.

신창호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