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 실천하는 사람들… 살며 움켜쥐었던 소유 다른 이들 위해 ‘손을 펴는 나눔’ 전파

입력 2010-07-16 17:26


12년 전 별세한 한 유리회사 회장은 부인 앞으로 집 한 채만 남기고 거액의 재산을 사회복지재단에 기부했다. 또 대전에서 생을 마친 백모 사장은 소유한 부동산을 처분한 금액을 3등분해 교회, 고아원, 쌀 나누기 운동 등에 기부했다. 중소업체 사장 최모씨는 100억원가량의 재산을 장학재단, 복지시설, 농아학교 등에 기증했다.

이들은 사회에 누룩처럼 소리 없이 번져 온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우리의 재산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기본정신 아래 그동안 움켜쥐었던 것을 사회를 위해 사용하며, 자녀들에게 남기지 않는다는 취지의 이 운동은 기부문화를 사회에 확산시켜왔다.

운동은 한국기독교가 선교 100주년을 맞은 1984년 이른 봄에 싹트게 됐다. 기독실업인들의 조찬모임에서 서울대 손봉호 교수가 “여러분이 세상에서 예수 귀족으로 냉소의 대상이 되느냐 충성스런 청지기로 아름답게 사느냐는 오직 재물에 대한 가치판단에 달려 있다”고 전제한 후 재산의 사회 환원을 호소했다. 재벌 2세들의 향락적인 소비가 사회문제화되던 때였다.

당시 한국유리 최태섭 회장, ㈜밀알의 최창근 회장, 경향신문 김경래 편집국장 등이 발기한 모임은 현재 850여명이 가입돼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다. 회원 중 70%가 기업 경영인이며 30%는 전문직업인이다. 국외 거주 실업인과 여성 실업인도 포함돼 있다. 재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자발적인 시민운동이다.

모임의 특징은 ‘5무(無) 원칙’과 ‘3유(有) 지침’이다. 5무는 무강령, 무홍보, 무사업, 무조직, 무회비다. 모임의 조직도 없고 대표도 없다. 개인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회원명단은 공개하지 않는다. ‘3유(有) 지침’은 죽음을 예비해 해가 바뀔 때마다 유언장 새로 쓰기, 유족이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유산의 3분의 1만 남기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기, 이 운동이 누룩처럼 소리 없이 번져가도록 이웃과 친지에게 권하는 것이다.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에 참여하는 회원들은 새해에 유언장을 새로 작성해 가족들에게 읽어준다. 재산의 3분의 1은 후손에게 남기고, 3분의 1은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고, 나머지 3분의 1은 사회에 기부한다는 내용의 유언이다.

유언장은 한 사람이 자신의 죽음 이후를 내다보고 쓰는 것이므로 허투루 쓸 수 없다. 회원들은 유언장을 쓰는 순간부터 생활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유언장은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작지만 ‘위대한 약속’이다. 회원들이 우려했던 것은 가족들의 반응이었지만 90% 이상의 자녀들이 아버지 유언장을 읽은 후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아버지를 존경하게 됐다고 회원들은 전한다.

“아이들의 눈빛이 바뀌고 자립의지가 솟구치는 것 같아요.” “교회나 사회단체에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해마다 유언장을 새로 쓰다 보니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고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모임의 발기인 대표를 맡았던 한국교회100주년사업협의회 김경래(77) 사무총장은 “유언장을 작성하고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라며 “유언장을 쓴 직후부터 사회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본격적으로 실천하는 회원도 많다”고 밝혔다. “자기 소유를 정리해 복지법인을 설립한 회원도 생겨났고, 상당한 금액을 모교의 장학재단 설립 기금으로 희사한 분도 있습니다. 또 고향에 교량을 놓거나 도서실을 만들고 선교센터를 세우는 등 여러 분야에서 운동이 확산되고 있어요.”

사재를 털어 일산에 중남미문화원을 세운 이복형(77) 원장은 “자녀에게 유산을 물려주는 것은 생각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겨 운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재산을 공익 법인화했고 사후 시신기증까지 서약했다. 주식회사 진흥의 박경진 회장은 아예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교회 명의로 해놓았다. “우리 부부가 살다가 죽으면 이 집은 자연스럽게 교회 소유가 되는 거지요.” 이외 매스컴에 보도되지 않은 유산의 사회 환원 또는 기증 사례들이 있으나 운동의 실천 강령에 따라 대외적인 공개나 홍보를 삼가고 있다.

한 사람의 사소한 행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건 아마도 누룩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이 바로 ‘작고 위대한 약속’이다.

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