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외로울 때만 슬며시 오는 것… ‘산알’의 시학

입력 2010-07-16 17:59


김지하 시집 ‘흰 그늘의 산알 소식과 산알의 흰그늘 노래’

1960년대 후반 북한 당국은 생물학자 김봉한을 처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죄목은 인민들을 생체 실험 대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른바 ‘산알이론’의 주창자로, 인체 경락의 실체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야전병원 의사로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산알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고 한다. 이후 평양의과대학에서 인체에 존재하는 경락의 실체에 대해 연구한 결과 몸 안에 많은 수의 ‘산알’과 이것을 잇는 그물망 같은 물리적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를 ‘산알이론’으로 확립하였다.

‘산알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몸 속에 숨어 있는 에너지와 질서가 이미 드러나 있는 에너지나 질서에 교감하고 충돌하면서 어느 순간 몸 위로 들어올려지게 된다. 하지만 ‘산알이론’은 사회주의 국가의 테제인 마르크스의 정반합의 변증법과 상충되는 이론이기도 하다. 예컨대 정반합의 변증법은 정, 반, 합이라는 3분법에 의해 정립되지만 김봉한은 이에 반해 산알의 드러남과 숨김, 있음과 없음이라는 2분법으로 변증법을 작파해버렸던 것이다. 이 이론에 대해 ‘비인도적인 인체실험을 통해 연구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국제적 의혹이 제기되자 입장이 난처해진 북한은 정치적 판단에 의해 김봉한과 그의 ‘산알이론’을 매장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산알이론’은 일본경락학회에서 받아들여 지금도 연구되고 있을 만큼 그 파장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 여름 강원도 원주로 거주지를 옮긴 김지하(69) 시인은 치악산 산세를 벗삼아 산알이론을 시와 노래로 끌어들였다. 그는 두어 달 만에 수백 편의 시를 쏟아낼 정도로 에너지가 충만해 있었다. 김지하가 평생 붙들고 있는 생명사상과 흰그늘론은 산알이론과 만나 격렬한 물꼬를 트기에 이른 것이다.

‘흰 그늘의 산알 소식과 산알의 흰 그늘 노래’(천년의시작)는 그 물꼬에서 내뿜어진 언어적 물줄기를 보여주는 시집이자 담론집이다. 산알이론을 통해 생명사상을 과학화하고 감각화한 셈이다. 근자들어 쓰나미와 아이티 대지진 등 지구의 대혼돈 현상에 관심을 기울여온 그는 인체의 경락을 짚듯 지구적 대격동기에 대응하는 치유 문학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의 편재 또한 이중구조다. 1부 ‘흰그늘의 산알’에서는 한 테마에 대한 철학적이고 산문적인 단상을 적고, 2부 ‘산알의 흰그늘 노래’에서는 그 테마를 다시 시로 노래하고 있다. 테마는 제도, 열기, 주체, 공부, 철학, 문화, 소통 등을 비롯해 모두 121종에 달한다.

“이제까지의 여러 이치나 산알들은 각자 각자 혼자서 수련해야 한다. 혼자 수련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산알은 독특한 개체성, 개성을 갖고 있다. 우주생명은 개체 안에 압축되므로 개수(個修)해야 <산다>. 생명은 개체 개체의 신성한 요인들을 갖고 있다. 이것들이 명심하고 반드시 제 나름나름으로 수련돼야 한다.”<1부-개수(個修)>

“아무리/내 아끼는 자식이지만/혼자다//제 방에 애비 드는 것도/죽어라 싫어하는 요즘 아이들//잘못인가/아니다//산알은 혼자에게만 온다/그러나 산알은/우주생명에게만 오는 것/혼자만에/한울이 있어야만 오는 것//그렇지만/한울이 반드시/혼자일 때만 혼자서 외로울 때만 슬며시 오는 것/까다로운 것/쉽지 않은 것/아낙과 애기들과/쓸쓸한 이에게는/늘 흔한 것./아./어렵다//각오 없이는/또 드넓게 열지 않으면//그런 건/없다”<2부-개수(個修)>

시적 단상은 지구 전체로, 우주로 확장되고 있지만 그가 드러내고자하는 요체는 의외로 명료하다. 낮고 어둡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주인되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개수’에서 아낙과 애기들과 쓸쓸한 이에게는 늘 흔한 것이라고 했거늘 그들은 바로 낮고 어둡고 보잘 것 없는 하층, 하류 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들은 늘 권력이나 주류세력에 눌려 살았으나 이제 곧 지구가 용트림을 해 쓰나미가 몰려오고 대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상층이 하층되고, 하층이 상층되는 대반전의 역사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예단하고 있는 것이다.

시집은 이렇게 121종의 테마를 소화한 다음 ‘흰꽃’으로 마무리된다. “경북/청도의 칠곡/숲속이다 대낮이다/창 밖에 하아얀/민들레씨 가득히 난다//가득가득하던/그 아득한 옛 감옥창살에서/생명을 깨우쳤더니//오늘/여기엔/왜 오시나//가슴 먹먹한 저 밑에서/희미하게 떠오르는/아내의/흰/빛//아이 엄마의/흰/아/평화./내 생애 처음의 사랑/그렇다/개벽.”

그는 “이 글은 떠오르는대로 여러 날에 걸쳐 쓴 것”이라며 “시문학을 비롯한 오늘날의 모든 문화의 첫째가는 기능은 소통과 치유다. 치유의 예술만이 참다운 흰그늘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16일 서울 인사동 물파공간갤러리에서 열린 김지하 시인의 출판기념회에는 일본경락협회 관계자와 과거 김지하의 석방운동을 주도했던 일본과 미국의 지인들이 참석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