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비시 징용 보상 협상] 日전범기업 테이블 앉히기 성공… ‘시민의 힘’ 빛났다
입력 2010-07-16 00:23
일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협상에 응하기로 결정한 미쓰비시중공업은 지난해 말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99엔(약 1250원) 보상’ 관련 기업이다. 향후 협상 결과에 따라 미쓰비시가 피해자에게 금전적 대가를 지불하면 일제시대 이후 소송과 관계없이 최초로 보상하는 사례가 된다. 미쓰비시가 협상에 응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이유다.
이번 협상은 기대가 크다. 일본 지방의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한 정부의 성의 있는 대응을 촉구하는 의견서가 잇따라 채택되고 있고, 일본 관방장관이 최근 피해자 개인 보상이 가능함을 시사하는 등 전후(戰後) 보상에 관한 우호적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일본 기업이 한국인 강제노동 피해자에게 금전 지급을 한 경우는 지금까지 딱 두 건 있었다. 2006년 작고한 김경석씨가 1991년 일본 철강업체인 일본강관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410만엔의 ‘위로금’을 받았다. 근로정신대 출신 할머니 7명(당초 원고 3명+추가 4명)은 일본 기업 후지코시와의 소송 과정에서 1·2심 패소 뒤 2000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화해해 ‘해결금’을 받았다.
두 건의 금전 지급은 일본 재판부가 화해를 주문해 이뤄졌다. 반면 이번 협상은 원고 패소로 재판이 종결된 뒤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기업이 법적 책임을 공식적으로 면제받았음에도 스스로 피해자 보상 협상에 나섰다는 얘기다. 앞으로 일본의 다른 전범기업에 법적 책임과 별도로 피해자 보상에 나서라고 촉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전범기업의 사죄를 이끌어낼 가능성도 생겼다. 앞서 기업들은 ‘보상’보다는 위로금, 해결금이라는 명분을 붙였다. 진심어린 사과와 결부된 보상은 사실상 한 차례도 없었다. 이번에는 미쓰비시와 피해자 측 협상이 변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만큼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과거 잘못에 관한 기업의 입장 표명이 포함될 것으로 관측된다.
◇배경=피해자들은 10대 소녀 시절 근로정신대로 1944∼45년 일본 나고야에 있던 미쓰비시 항공기제작소에서 강제노역했다. 미쓰비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과 별도로 일본 정부에 당시 가입했던 후생연금(우리나라의 국민연금 성격)을 반환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원금 ‘99엔’만 그대로 돌려받았다.
미쓰비시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낸 가장 큰 요인은 피해자 측의 노력이다. 지난해 10월부터 광주 미쓰비시자동차 전시장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는 등 지속적으로 보상을 요구했다. 광주·전남 지역사회가 중심이 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활동을 주도했다. 일본에서도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등이 주축이 돼 미쓰비시를 압박했다. 피해자 측은 지난달에는 일본을 방문해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앞에서 삼보일배 시위를 했다.
국내의 여론조성도 한몫을 했다. 국민일보가 ‘잊혀진 만행… 일본 전범기업을 추적한다’ 시리즈를 지난 3월부터 보도하는 등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여러 언론이 전후 보상 문제를 거론했다. 국민일보는 가장 많이 한국인을 징용(3355명)한 기업으로 미쓰비시를 지목했다. 여기에 ‘99엔 보상’ 논란까지 불거져 미쓰비시 입장에서는 한국 내 영업 활동에 큰 위기감을 느꼈을 법도 하다.
다만 우리 정부가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15일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들이 내 나라 내 정부를 놔두고 일본 정부의 선처에 기대도록 하는 것은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라고 지적했다.
◇전망=협상이 금전적 보상으로 이어지더라도 넘어야 할 관문이 여럿 있다. 먼저 보상 대상자를 결정하는 일이다. 피해자 측은 피해가 확인된 사람과 유족에게 모두 보상해야 한다고 요구하겠지만 미쓰비시의 경우 소송을 제기한 원고 8명에게만 보상하겠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2008년 4월 기준으로 미쓰비시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서 일한 사실을 우리 정부가 파악한 경우는 41건이다.
보상 수준도 쟁점이 될 전망이다. 후지코시 소송에서 화해한 할머니 7명은 총 3500만엔을 받았다.
협상 기간은 의의로 짧아질 가능성이 있다. 8월 15일 광복절 전에 결과를 내야 양측 모두에게 의미있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권기석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