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In&Out-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 너무 젊은, 너무 새로운… ‘정희’란 무엇인가

입력 2010-07-15 18:09


홈페이지에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는 ‘40문40답’ 코너가 있다. 장단점, 보물1호, 스트레스 해소법, 징크스, 한 달 용돈, 가장 행복했던 또는 후회됐던 순간, 첫사랑, 슬럼프, 인생 최고의 거짓말 등등.

찬찬히 읽어보면 ‘무조건 열심히’ 스타일이다. 1년 내내 오전 7시에 출근하고, 잠도 4시간만 잔다. “남들 놀 때 다 놀고 남들 잘 때 다 자고 언제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느냐”는 어머니 말씀을 ‘내 인생의 한마디’로 삼고 있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대충 하지 뭐”라고 한다.

이 홈페이지의 주인공은 요즘 떠오르는 여성 정치인이다.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을 엄청 까발렸다. 정계의 ‘스타일 아이콘’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 홈페이지에도 이런 식의 접근은 없다.

민주노동당 새 대표로 선출된 이정희. 변호사 출신 41세 초선의원이다. 수수하고 친근한 외모, 논리적이고 야무진 언변, 날카롭고 성실한 의정활동…. 2년 전 민노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그녀는 일찌감치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았다. 강렬한 인상도 남겼다. 단식과 육탄돌진을 불사하는 투쟁성으로. ‘압박정희’ ‘국회 아이돌’ 등의 별명을 얻은 이유다.

다른 당 사람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가슴과 영혼으로 일하는 느낌을 준다”고 극찬한다. 국회 보좌진이 선정한 ‘2009년 가장 돋보인 의정활동을 한 의원’ 1위, ‘가장 함께 일하고 싶은 정치인’ 공동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헌정 사상 최연소 정당 대표가 된 그녀를 지난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우선 한나라당 사람 중엔 칭찬하는 이가 없는지 물었다.

“참 곤란하네요. 이름을 말할 수도 없고. 혹시 그분들이 곤란해질 수도 있는데…. 그냥 이 정도로 말씀드릴게요.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정책 토론을 할 때, 민노당이 이렇게 부드러울 줄 몰랐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한나라당 쪽에. 서로 신뢰가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4대강 예산을 놓고 격돌할 때, 제가 강기갑 홍희덕 의원과 함께 본회의장에서 12시간 서 있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도 한나라당 의원들이 그러시더라고요. 민노당은 진짜로 싸우는 것 같다고, 민노당은 쇼는 안 한다고.”

어린 시절을 보면 공부벌레, 모범생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서울 방배동 서문여고 출신이고, 대입 학력고사 전국여자수석으로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 1학년 때인 1987년, 6월 항쟁을 경험하면서 운동권 학생이 됐고 총여학생회장을 지냈다. 대학 졸업 무렵 만난 한 여자아이가 그녀를 법조인의 길로 이끈 계기가 됐다고 한다.

“동두천에서 만난 여섯 살 여자아이를 아직도 못 잊어요. 엄마는 성매매 여성이고 아버지는 미군이었는데, 그 아이는 포주랑 살고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일찌감치 본국으로 돌아갔고, 엄마는 빚 2000만원을 남겨놓고 도망간 거예요. 그런데 왜 포주가 아이를 돌봐주고 있느냐? 여자아이가 좀 크면 10대가 되니까 성매매를 시키겠다는 거죠.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그때가 93년 여름이었어요. 그 아이를 보고 법조인이 돼야겠다고 결심했죠. 공부를 하려고 새로 형법 책을 사서 맨 첫 장에 그 아이의 이름을 적어놨어요.”

이 대표는 “사람들의 얼굴을 잘 잊지 못한다”며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저를 쉽게 다른 곳으로 못 가게 한다”고 말했다. 그 중에는 중학교 친구들도 있다.

“제 또래만 해도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여학생들은 여상에 갔어요. 저는 걱정 없이 공부했죠. 대학도 가고. 삶이란 게 그렇게 (출생과 같은) 우연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안했던 거 같아요, 저와 다른 우연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그래서 내가 경험하게 된 것들, 가지게 된 지식을 같이 나누어 썼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사법시험에 합격해 2000년부터 변호사로 일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참여했고 미군, 평화, 여성 등의 분야에서 꾸준히 사회운동을 해왔다. 이때만 해도 정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사법연수원 시절인 스물아홉에 결혼, 두 아들을 둔 엄마로서 보통사람처럼 살았다. 민노당 당적도 없었다. 민노당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18대 총선 직전인 2008년 3월 영입 제의를 받고 이틀 만에 입당을 결정했다.

“인권변호를 하면서 늘 옆에서 민노당이 하는 것을 지켜봤어요. 열심히 하는구나, 그렇게 느꼈죠. 특히 남북관계나 한·미관계와 관련해 민노당의 시각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봤어요. 보수적인 여론이나 자기검열에 맞서 민노당이 용감하게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판단했거든요. 그런 당이 어렵다고 하니까 들어온 거죠.”

입당에 대한 그의 설명은 두 가지 측면에서 놀랍다. 우선 입당 시점. 분당(진보신당)으로 민노당에 대한 비판과 실망이 가장 커져 있던 시점에 민노당을 선택했다. 입당 이유도 의외다. 남북관계와 한·미관계를 바라보는 민노당의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민노당이 아니라면 국회의원 안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 2년. 이 대표가 경험한 국회의원 일은 변호사와 비슷하다. 누군가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재판부 앞에서 사실을 되살려내고 해결 방법을 원칙에 맞게 내놓고 재판부가 여기에 동의하게 만드는 게 변호사 일이에요. 의뢰인이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말로 글로 풀어주고, 재판부를 설득해서 우리 편으로 끌어와야 되는 거죠.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도 같아요. 국민으로 이뤄진 재판부에게, 벌어지는 일을 쉽게 설명하고 현실의 해결 방법을 내놓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해야 되는 거죠.”

지난 6월 당 대표직에 출마하면서 이 대표는 ‘진심의 정치’를 내걸었다. “정치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는 말도 자주 한다.

“정치라는 게 정책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하는 것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통하게 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진심밖에 없어요. 먼저 믿고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게 진심의 정치예요.”

민노당은 6·2 지방선거에서 꽤 풍성한 수확을 거뒀다. 이후 민노당은 도약의 열망을 분명히 드러냈다. 도약해서 닿고자 하는 곳은 수도권, 그리고 젊은층이다. 당의 얼굴을 교체했다. 당심(黨心)의 선택은 이정희였다. 민노당은 왜 그를 선택했을까?

“우리 당이 10년 됐어요. 권영길 대표 중심으로 노동자 기반을, 강기갑 대표 중심으로 농민 기반을 닦아놓았죠. 그게 이번 지방선거에서 영·호남의 성과로 나온 거예요. 수도권 젊은층에서는 아직도 저희가 부족해요. 우리 당 득표율이 호남 17%, 울산 34% 됐는데, 수도권에서는 굉장히 낮았어요. 수도권에서 30~40대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 논리적이고 부드러운 사람,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죠.”

“우리 당이 주장해 온 무상급식도 이번에 실현됐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건강보험 문제를 얘기하려고 해요. 건강보험 하나만 있으면 치료비 걱정 안 하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수도권 도시민들의 관심하고도 연결돼 있을 거예요. 보편적 복지정책으로 지지기반을 넓혀나가려고 해요.”

이 대표의 말은 명쾌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 큰일을 맡았다는 부담감은 없을지 궁금했다.

“너무 무거운 일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대표 출마를 결심할 때는,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이 우리 당의 과제와 일치하는구나, 그렇다면 그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선거운동을 마칠 때쯤, 초선을 당 대표로 만들 수 있다는 게 당원들의 자신감이라고 판단하게 됐어요. 그러니까 무거운 마음이 사라지고 잘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당의 매력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정당의 매력’이란 말은 ‘진심의 정치’처럼 왠지 어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대표는 여러 차례 매력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민노당이 거칠고 투박하지 않느냐,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는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얘기들이 있었어요. 민노당의 말과 실천을 좀더 부드럽고 명쾌하게, 그러면서 유연하게 바꿔나갈 거예요. 매력 있는 정당이 돼야죠. 젊은 정치인들을 많이 부각시키려고 해요.”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