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찾아 떠나 삶을 배우고 미래를 그리다

입력 2010-07-15 18:03


런던 일러스트 수업/munge & sunni/아트북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의 말을 따라간 두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다. 그림책 작가로 활동 중인 먼지(munge·본명 박상희·36)와 서니(sunni·본명 이지선·40)가 그들이다. 꿈을 그려가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풍덩 빠져보자.

# 먼지 이야기

대학 졸업 후 ‘반 백수’로 10여년을 보낸 먼지. 백수 생활을 했지만 마냥 놀지는 않았다. 그녀의 홈페이지는 꽤 알려져 있었다. 홈페이지에 일기처럼 올린 카툰을 모아 첫 책을 출간했지만 그닥 성공적이진 않았다. 전환점이 필요했다. 10여년간 저축한 4300만원을 털어 유학을 준비한다. 마침내 2002년, 영국 킹스턴 대학교 일러스트레이션앤드애니메이션 MA(석사) 과정에 입학한다.

먼지가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캐릭터였다. 원래 사람이었던 캐릭터를 동물로 바꿨다. 스토리에 어울리는 적절한 은유법도 만들어졌다. 교수들도 새로 만들어진 캐릭터를 보고 흡족해 했고 외부 초청심사관도 맘에 들어 했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캐릭터를 완성하는 동안 스토리보드는 7번이나 바뀌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캐릭터들의 연속 동작을 보여주기 위한 단 3분을 위해 2000장의 종이를 책상에 쌓아놓고 4개월에 걸친 고된 노동에 들어갔다. 그걸 일일이 스캔 받아 졸업작품을 준비했다. 런던 시내의 갤러리를 대관해 열린 졸업작품전(런던 쇼)에서 먼지는 첫 일러스트를 의뢰받는다.

1년5개월의 영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첫 해, 운 좋게 자기계발서 두 권의 속표지에 인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귀국 후 1년 동안 먼지가 번 돈은 고작 560만원. 연봉이 560만원이라고 생각하니 앞일이 캄캄했다. 실은 이게 보통 일러스트레이터의 현실이다. 아니, 시작치고는 썩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한다는 건 일정한 수입이 보장된 생활과는 거리가 먼, 프리랜서의 삶을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지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들어온 일거리를 해나가며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살기 시작한다. 새로운 인생이 막 펼쳐지고 있다.

# 서니 이야기

유수의 출판사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던 서니는 좋은 평가를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직장인으로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니 또한 유학을 결심한다.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림에 모든 걸 던지고 싶었고, 자신의 모든 시간을 한곳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그녀 역시 킹스턴대에 1년 예정으로 입학하지만 꼬박 4년을 영국에서 보내게 된다. 영국에 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리는 없었다. 별 문제 없이 멀쩡하게 작업할 수 있었던 한국의 스피디한 주변 환경은 런던에선 결코 기대할 수 없었다. 프린터에 작은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예약하고 수리하는 데 3주일이나 걸리고, 프린팅 숍에 출력물을 맡기면 며칠씩 걸리는 게 보통이었다.

서니는 킹스턴 대학을 거쳐 브라이턴 대학 석사 과정으로 진학한다. 킹스턴을 1등으로 졸업하고 작품도 어느 정도 인정도 받은 터였다. 그림책 세계에서 손꼽히는 워커북스에서 출간 제의까지 받은 그녀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외의 난관에 부딪힌다. 그녀가 구상한 일러스트는 상식을 뒤엎는 검은 사자였다. 워커북스 에디터는 사자의 색깔을 평범한 노란색으로 바꿀 것을 제안해 왔다. 사자가 검은 색이면 무섭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판매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니는 자기만의 검은 사자를 고집했다. “하지만 아니다. 사자는 검은 색이어야 한다. 검은 사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관념적인 존재로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다.” 그녀는 결국 워커북스와의 구두계약을 파기하고 일본의 한 출판사에서 ‘검은 사자’를 출간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호평이었다.

# 에필로그

먼지와 서니 이야기는 단순한 유학기가 아니라 꿈을 잊지 않고 꾸준히 걸어 나간 ‘두 번째 출발’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일러스트 했다. 두 사람 다 그림에 있어서의 허명이나 허세를 버리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너무 거창한 것 같다. 내가 얻은 것은 새로운 것을 채우기 위해 묵은 내 자신을 비우는 법이었다.”(먼지)

“계획표대로 짜여 있던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길고 여유로운 한숨을 쉬며 유유자적함을 벗으로 얻었고, 그저 그림 그리는 것 하나에도 온 우주를 느낄 수 있길 바라는 아주 소박한 행복주의자가 되었다.”(서니)

# 사족

서니와 먼지는 본인들의 사진 공개를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내왔다. 꿈이 담긴 그림이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