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의 야구 콩트] 슬럼프 탈출, 퀴즈쇼
입력 2010-07-15 18:18
사회인 야구선수로 뛰고 있는 이시용씨는 극심한 타격 슬럼프에 빠진 고민남이었다. 어쩐 일인지 도저히 공이 배트에 맞질 않고, 간혹 맞더라도 죄다 땅볼이었다. 타격이 되질 않자 수비까지 흔들리기 시작해 그는 자기 포지션인 1루에서 포구 실책을 연발했다. 그의 팀 감독이 말했다.
“1루수는 팀에서 가장 공을 잘 받는 사람이 맡는 자리라는 거 알지?”
이씨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자신의 출전 권한을 지닌 남자의 입술만 바라보았다.
“당분간 선발 라인업에서 빠져 있어.”
이씨는 그 한마디에 후보로 밀려났다.
“다른 사람들 하는 걸 보고 즐기라고. 야구에 관련된 건 모두 즐거운 거야.”
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질 않았다. 이씨는 쓸쓸한 마음으로 담배를 피우러 갔다. 그때 그의 눈앞에 펑, 하고 처음 보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시용군, 타격감을 되찾고 싶나?”
“누구세요?”
“나는 야구의 알파와 오메가, 야구대왕이다. 나는 퀴즈를 내는 걸 아주 좋아하지.”
이씨는 그 남자가 다짜고짜 반말을 쓰는 것이 수상했지만 일단 펑, 하고 나타난 게 신기해서 귀를 기울였다.
“내가 내는 퀴즈를 맞힌다면 자네의 타격감을 돌려주지. 지금 타율이라면 사회인 야구 당장 그만두고 당구나 치러 다니는 게 나아.”
“제게 돌아올 타격감이라는 게 있나요?” 이씨는 솔깃해져서 물었다.
“5년 전 여자친구에게 차인 뒤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분노의 배팅 머신을 때릴 때 생성된 게 있군. 내가 잘 보관 중이지. 자! 잔말 말고 퀴즈를 시작하지. 문제의 범위는 오로지 야구다. 세상에 야구가 아닌 것은 없으니까 범위가 넓고 깊겠지? 하지만 불쌍하니까 난도를 대폭 낮췄어. 그럼 첫 번째 문제.”
이씨는 담배를 야구화로 비벼 끄고 퀴즈 풀 준비를 했다. 타격감을 꼭 찾고 싶었다.
“첫 번째 문제는 아주 쉬워. 오 엑스 퀴즈지. 야동이란 단어는 야한 동영상을 말하는 것이다. 오 엑스 중에 선택해.”
“오!”
“틀렸어! 이러니까 야구를 못 하는 거야. 야동은 야구 동영상을 말하는 거야. 처음부터 틀리다니 애석하군. 하지만 기회를 한 번 더 주겠어. 이번에도 못 맞히면 탈락이야. 그럼 다음 퀴이∼즈. 이번 건 야구에 대한 애정과 야구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 현상에 대한 문제야. 이건 자네 얘기니까 잘 알겠지? 자넨 야구를 몹시 사랑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지만 야구를 엄청 못 해. 그건 왜 그럴까? 자, 야구 사랑과 야구실력이 반비례하는 이유로 가장 타당한 것을 다음의 보기 중에서 고르는 거야.”
ㄱ. 야구도 좋아하지만 술도 좋아하기 때문에 훈련과 경기를 통해 실력이 늘어봤자 술 마시고 원위치된다.
ㄴ. 실은 야구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애정이 부족한 곳에 충분한 보상은 없는 법. 실력이 늘 만큼의 애정을 기울이지 않았고 주량만 잔뜩 늘렸다.
ㄷ. 야구를 우습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연하게 야구를 즐기는 것이 피땀 흘려 야구를 잘 하는 것보다 우선한 가치라는 약해빠진 핑계에 경도돼 있다.
ㄹ. 야구를 사랑하고 실력도 있는 지도자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어서다.
ㅁ. 야구대왕이 야구에 대한 재능을 주지 않아서다.
이씨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가장 타당한 것이라니, 모든 게 타당한 이유인 것 같았다. 엄격한 자기관리와 야구에 대한 강한 집중력 없이는 실력이 늘지 않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걸 게을리 했다. 사회인 야구 레슨도 받아봤지만 코치가 교정하라는 주문대로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이게 제 스타일이에요’라는 변명만 했다. 그는 잠깐 주저하다가 보기 <ㅁ>을 선택했다. 그러자 야구대왕이 버럭 소리쳤다.
“요, 맹랑한 똥구멍 같은 것! 나는 모든 사회인 야구선수들에게 골고루 재능을 나눠줬어! 재능 따위는 야구 실력을 좌우하는 데 눈곱 만큼밖에 영향이 없도록 해 놨지. 등신같이 두 문제 모두 틀려버리다니 형편없군. 정답은 <ㄱ>이야. 자네는 술 때문에 망한 거야. 그게 자네 슬럼프의 원인이라는 걸 몰라? 하루에 소주를 두 병씩 하루도 안 쉬고 마시니까 매 타석 땅볼을 때리는 거야. 술은 무겁고 혼탁한 기운을 갖고 있어 정신력에 ‘빵꾸’를 내고 타구를 땅바닥으로 끌어내리지. 야구공은 정신의 영역이 아니라 몸의 영역에 속하는 물질인 거야. 야구를 사랑하는 건 정신, 야구공은 물질, 그 상관관계를 알겠나?”
“그렇군요. 그런 거였군요. 술을 좀 줄여야겠군요.”
“지금 깨닫는 척 해봐야 소용이 없어. 또 마실 거잖아.”
이씨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야구도 좋아하고 술도 좋아하면 안 되나. 전날 폭음하고도 굉장한 플레이를 보여준 프로 선수들도 많은데. 야구대왕이란 자는 이씨를 한참 노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자넨 불쌍하게 생겼으니까 특별히 한 문제만 더 내겠어. 이번에 또 틀리면 국물도 없어. 이번 건 조금 난센스 퀴이∼즈. 야구의 매력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르는 거야. 집중해.”
갸. 야구 중계를 보다 자장면도 먹고 싶고 짬뽕도 먹고 싶어서 짬짜면을 주문했는데 배달원의 실수로 마파두부밥이 왔다.
냐. 여자친구와 야구장 데이트를 하다 그물을 넘어온 파울볼을 잡았는데, 공수교대 때 치어리더 다리를 넋 놓고 보다 걸려서 따귀를 왕복으로 맞고 낭심도 걷어차이고 파울볼도 잃어버렸다.
댜. 우천으로 경기가 취소돼 사들고 온 치킨을 야구장 처마 밑에서 쓸쓸히 먹고 있는데 프로야구 선수가 지나가는 걸 보고 급한 마음에 닭다리에다 사인을 받았다.
랴. 야구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조마조마함이 있다. 스트라이크 존이라는 마력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공 하나하나의 승부는 경기시간 내내 피를 말리는 멘탈과 신체 능력의 대결점이다. 그 대결점은 보이지 않는 형태로 돼 있다. 더구나 배트도 둥글고 공도 둥글어서 대결점은 그야말로 점의 형태다. 거기서 끝을 알 수 없는 조마조마함이 생기고 그 한 점에 매력의 절정이 깃들어 있다.
“자, 답은 뭘까. 이 문제에는 함정이 있으니 조심해서 답하도록.”
‘함정이고 나발이고’ 이씨는 생각했다. ‘보기 <댜>의 프라이드치킨은 뭐야? 아무리 급해도 닭다리에 사인을 받는 사람은 없을 거야. 실수로 먹어버릴 수도 있고, 간직하려고 별 짓을 다 해봤자 썩어버릴 텐데. 그게 무슨 야구의 매력 중 빼어난 점이야? 유명선수에게 받는 사인이라면 자기 가슴 속이 적당하지. 그래야 잃어버릴 염려도 없고 그 선수의 플레이를 닮으려 하는 마음가짐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이씨는 나머지 보기 중에서 도저히 정답을 고를 수가 없었다. 야구의 매력은 수만 가지가 넘으며 전방위의 미학을 수용한다. 겨우 4개의 보기밖에 안 됐지만 고르기란 너무 까다로웠다. 이씨는 시간을 끌다 할 수 없이 치어리더가 들어가 있는 보기 <냐>를 선택했다.
“설령 여친에게 맞더라도 야구의 매력은 역시 치어리더 언니들 아닐까요? 공수교대를 할 때 인간이라면 자칫 야구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거든요. 그걸 그 현명한 여인들이 훌륭하게 붙잡아 준단 말이죠.”
“그걸 정말 정답으로 할 건가?”
“물론 야구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정답이란 건 없겠죠. 그게 함정인 거죠? 그러니 무엇을 선택해도 정답일 테고, 나는 기왕이면 치어리더요.”
이씨의 말에 야구대왕은 짧게 끊어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끅, 끅, 끅, 함정에 빠지고 말았군. 자넨 완전히 실격이야.”
“뭐라고요? 어떻게 야구 실력은 늘지 않지만 야구 지식은 늘어만 가는 나에게 그런 헛소리를 지껄일 수가 있어요? 근거를 대요. 어째서 치어리더가 빼어난 야구의 매력 중 일부이지 않은지.”
“설명해주지. 정답은 <랴>야. 어째서냐면 치킨, 치어리더, 마파두부밥 같은 게 없어도 야구경기는 벌어져. 물론 그 모든 걸 야구로 인식해야 하는 게 옳다는 증명을 한 인간도 최근에 나왔어. 하지만 신의 영역에서도 야구를 매력적으로 인식하는 데는 반드시 야구공과 배트와 스트라이크 존이 필요해. 이 문제의 핵심은 야구의 기본 원론을 상기하는 데 있어. 현대 야구는 너무 많이 확장돼 그 속에서 야구의 본질을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아졌어. 자넨 타석에서 웃기려고만 하고, 끝나고 뒤풀이 하는 술자리를 경기보다 좋아하고, 경기 중에 상대팀 매니저 치마나 쳐다보는 멍청한 녀석이지. 정작 야구가 뭔지 잘 모르는 거야. 좋아하는 선수의 플레이를 닮고 싶어 하는 마음가짐은 알면서 이런 문제를 틀리다니 실망이군. 여기서 자넨 탈락이야. 자네가 잃어버린 타격감은 돌려주지 않겠어.”
아아, 하고 이씨는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이 왜 슬럼프에 빠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회한의 눈물 같은 것을 찔끔거렸다.
다시 펑, 하고 사라지려던 야구대왕이 그의 눈물을 보았다.
“넌 정말 불쌍하구나. 그렇게 야구를 잘 하고 싶어?”
“네. 전 야구가 너무 좋습니다.”
“에이, 내가 맘이 약해서 정말. 옛다, 타격감.”
야구대왕은 뭔가를 뎅그렁 떨어뜨린 다음 펑, 하고 사라졌다. 이씨는 그것을 주워들었다. 그것은 매혹적인 색깔을 가진 잃어버린 타격감이었다. 이씨는 그것을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당장 술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쓴이 박상
소설가.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소설집 '이원식씨의 타격폼', 장편야구소설 '말이 되냐',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출간 예정).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구성된 문인야구단 '구인회' 1루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