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아침] 관심
입력 2010-07-14 17:21
최문자 시인 ‘우리 사랑할까요’
참 좋은 인사법이 있다. 안부를 묻는 인사로 아프리카에서는 “당신이 보여요”라고 아침인사를 한다고 한다. 사랑하면 보인다.
몽골의 허허벌판 풀밭에서 양 치는 목동의 눈은 수㎞ 밖 산 밑에서 풀을 뜯고 있는 양의 마릿수까지 정확히 알아맞힌다고 한다. 시력이 뛰어나기보다는 양떼에 대한 관심과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같은 시력을 가지고 같은 지점에 서 있어도 보이는 것이 다른 것은 그동안 사랑해왔던 시간의 길이와 더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우리는 늘 보고 싶은 것, 눈에 확 뜨이는 것, 보기에 좋은 것, 필요한 것만 보려고 한다. 잘 보이지 않는 것, 차마 볼 수 없는 것, 보고 싶지 않은 것, 보면 해가 될 것 같은 것에 대해서는 최대한 피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나 거리를 걸을 때 우리를 스쳐간, 우리가 본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관심 없이 보면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대상이 없어도 눈만 감으면 보이는 사람이 있다. 보려는 마음이 가슴에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시인들은 보는 법이 남다르다. 남이 보지 않는 것, 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집착한다. 시 한 구절을 예로 들어보자.
“모래 속으로 천천히 감겨들어간 손을 보면/부드러움이 얼마나 공포일 수 있는지…(중략)/모래는 순장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김경주 ‘모래의 순장’ 일부)
누구나 볼 수 있는 모래지만 시인은 모래를 그냥 모래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모래를 무덤으로, 모래를 공포의 대상으로, 더 나가서 순장의 형태로까지 본다. 이는 사물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통찰력 때문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창조물에 대하여 갖는 깊은 관심과 사랑에 대하여 간과할 수 없다. 예수의 옷자락 작은 부분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 같은 여인을 사랑했으므로 예수는 보지 않고도 여인의 고통이 충분히 보였고 이미 보고 있었다.
어느 날 지하철 입구에서 좌판을 벌이고 야채와 콩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에게 콩나물 1000원어치를 사면서 자꾸 덤을 더 달라고 하더니 콩나물을 한 움큼 집어가는 어느 아주머니를 목격한 적이 있다.
손에 성경책은 들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 할머니의 고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모든 대상을 바라보기만 해도 고통과 상처와 눈물이 한꺼번에 클로즈업 되면서 잘 보여야 할 것이 아닐까? 나 자신부터 부끄러워지던 그날이었다.
아침에 만나면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보다 “당신이 보여요”라고 첫 인사를 한다면 약간 어색하지만 메마른 시대를 살아가는 이 아침, 하루 종일 흐뭇하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프리카식이지만 참 좋은 인사법이다.
<협성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