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연숙] 나는 개가 무섭다

입력 2010-07-13 19:42


트라우마는 현학적인 것 같아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단어 중 하나다. 그럼에도 트라우마로 여겨지는 몇 가지가 있다. 누군가의 트라우마는 ‘이혼’인데, 종종 꿈에서 이혼 전으로 돌아가 괴롭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의 트라우마는 이와는 좀 다른 유형의 것들이다.

일요일 오후, 부모님과 가볍게 집 앞산을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원래 가고자 한 길은 농약살포차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 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강둑으로 올라가니, 200m 앞쯤에 개 두 마리가 부부로 보이는 남녀와 함께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여름 오후의 산들바람에는 아랑곳없이 이제 온 신경이 개 두 마리에게 꽂혔다.

창피하게도 나에게는 개에 대해 말하기 거북한 공포와 거부감이 있다. 이때부터 나의 여흥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과연 저 개들이 줄에 묶여있어서 내가 안전하게 저 길을 통과할 수 있을지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개들은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릴 수 있는 크기였지만 마치 맹수처럼 느껴졌다.

100m쯤 가까워졌을까. 개들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걸 본 순간 공포심은 극에 달하고, ‘개들아, 제발 각자 갈 길을 가자’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한순간 개 한 마리가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처럼 왼쪽에서 걸어가는 엄마의 손목을 잡으면서 앞서 걷고 있는 아빠 등 뒤에 바싹 붙었다. 개 주인인 여자가 뛰어가는 개를 잡기 위해 뛰기 시작하자 나머지 한 마리도 덩달아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개들은 시끄럽게 짖어대며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나는 비명과 함께 주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 좀 잡든가 묶으라고! 여자는 미안해하며 나를 둘러싼 개들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에 엄마가 “우리 딸이 개를 무서워해요”라며 개를 빨리 데려가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에게 개는 애완의 대상이 아니라 피해야 할 짐승이다. 한때는 동물을 좋아했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된 일이 있었다. 그건 트라우마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

화를 가라앉히고 나니 개를 데려가던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자기들을 좋아해서 그러는 줄 알고 얘들도 좋다고 그러는 거예요.” 여자는 나의 과민 반응이 개들을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미처 몰랐던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개들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낸 결과였다. ‘너희들이 싫어’라는 마음을 품었음에도 개들은 ‘너희들이 참 좋구나’라는 거짓된 신호로 받아들이고 ‘나도 네가 좋다’는 반응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에 ‘내가 언제 그랬냐?’고 대응한 셈이니 꼴이 우습게 됐다. 개와 고양이 사이에 신호의 오해가 있다지만, 그게 사람에게도 적용될 줄이야.

다만 개를 무서워하면서도 극복하는 방법도 찾은 듯해 뿌듯하다. 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도 개와 나누는 신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는 얼마나 진실되고 정확한 신호를 주고받고 있을까.

김연숙(출판도시문화재단 기획홍보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