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베를린 막사·작센하우젠 수용소 복원 왜… “가해 흔적 보존하는 건 역사적 책무”
입력 2010-07-13 19:05
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
제4부 국치 100년, 이젠 해법 찾아야
① 일본이 배워야 할 ‘전후보상’ 교과서, 독일
지난달 30일 독일 베를린 남동부 쇠네바이데 지역 주택가. 어른 어깨 높이의 철조망 너머로 막사 여러개가 보였다. 막사는 모두 11동(棟). 각각 330㎡ 넓이의 건물 11개가 하나의 캠프를 이루고 있다. 모두 1943년에서 45년 사이 나치 정권이 유럽 각지에서 끌고 온 포로와 민간인을 부리기 위해 만든 일종의 기숙사다.
철조망 문을 통과해 막사 안에 들어가자 옛 강제노동자의 흔적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전후 95년까지 백신연구소로 쓰이던 건물의 한 방에는 짙은 갈색에 지름이 약 1m인 석재 시설물이 있다. 이곳 책임자인 크리스틴 글라우닝 박사가 강제노동자들이 사용하던 공동 대야였다고 알려줬다. “당시 한 막사에 160∼200명이 지냈는데 이런 공동 대야 3개를 이용해 모두가 씻었습니다. 대야 하나로 60명 안팎의 노동자들이 씻은 것이지요.”
나치 정권 당시 베를린과 그 근교에는 이런 캠프가 약 3000곳 있었다. 여기처럼 보존 상태가 좋은 곳은 거의 없다고 한다. 막사가 벽돌로 지어져 가능한 일이었다. 강제노동자는 주로 이탈리아인이었다. 복원 중인 막사 지하 벽에는 이탈리아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숫자와 글씨가 있다. ‘21-3-45’(1945년 3월 21일)라고 쓰고 ‘PASATO’라고 적은 낙서였다. 철자가 하나 빠졌지만 Passato는 이탈리아어로 ‘지났다’는 뜻이다. 전쟁 막바지까지 이들은 날짜를 세고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인은 막사 주변의 한 공장에서 배터리를 만드는 일 등을 했다. 가혹한 노동을 주문한 기업 가운데는 세탁기와 청소기로 유명한 가전업체 AEG(아에게)도 있었다.
독일의 민간 재단 ‘테러의 토포그래피(Topographie des Terrors)’는 2006년부터 이곳에 ‘도큐멘테이션 센터’를 차리고 막사를 관리, 운영해 왔다. 11동 전부는 아니다. 서쪽의 6동과 동쪽의 1동만 관리한다. 동쪽 5동 가운데 4동은 현재 사우나장과 볼링장, 어린이집 등으로 쓰이고 있다.
글라우닝 박사가 열악한 막사 시설을 설명한다. “우리가 이곳을 여러 차례 조사했는데 불을 피운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겨울철에도 난방이 제공되지 않았다는 뜻이죠.” 이 막사는 복원 작업이 마무리되는 오는 8월 30일 일반에 공개된다.
같은 날 오후 베를린에서 서북쪽으로 약 35㎞ 떨어진 브란덴부르크주(州) 오라니엔부르크의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부지를 찾았다. 나치 시절 20만명이 수용돼 절반이 숨진 것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곳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전쟁포로와 강제노동자의 삶을 엿볼 수 있도록 당시 침실과 식당, 화장실, 병원, 시체 처리소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노르웨이 노인 10여명의 안내를 맡은 여성 가이드는 “노르웨이인 2500명이 이곳에 끌려왔다. 노르웨이 역사에서 중요한 곳이다. 어린 학생들도 많이 방문한다”고 말했다.
독일 사회는 왜 ‘가해의 흔적’을 보존하려 애쓰는 것일까. 글라우닝 박사에게서 ‘책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특히 학생들과 함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게 중요합니다.”
베를린·오라니엔부르크=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