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25주년' 홍정길 이동원 목사 코스타 시카고수양회 현지좌담회 전문

입력 2010-07-09 18:03


[미션라이프] 한인유학생 대상 복음 전도, 민족의 리더십 양성, 선교자원 개발이라는 목적으로 1986년 미국에서 시작한 코스타(KOSTA). 당시 미국에서 목회하던 이동원 목사가 홍정길 목사에게 제안했고,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코스타 창립의 산파역할을 했던 홍·이 목사를 코스타 시카고수양회 기간인 지난 6일 오후 수양회 장소인 휘튼칼리지에서 만났다. 평소 ‘형님’ ‘동생’ 하는 사이인 두 사람은 격의없는 좌담을 통해 코스타 25주년의 의미와 고민, 방향에 대해 피력했다.

-코스타 25주년의 의미를 평가해 달라.

△홍정길 목사=패트릭 존스톤이란 선교역사학자는 ‘한국 기독교 135년 역사에서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가 하지 못한 두 가지 일을 했는데, 1907년 새벽기도회와 86년 코스타’라고 했다. 우리도 코스타가 이렇게 성장할 줄은 몰랐다. 나는 1980년부터 미국 보스톤에서 한인 유학생들을 데리고 성경공부를 했다. 83년부터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유학생 30여명과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 목사는 워싱턴DC에서 젊은이들 대상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1회 코스타의 주축을 이뤘다. 이들을 훈련시켜 조국에 가서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기대했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지금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아시아 등으로 확대됐다. 대상도 조기유학생이 늘면서 청소년까지 포함하게 됐다. 코스타는 한국 유학생이 증가하던 시절에 하나님께서 준비했다고 생각한다.

△이동원 목사=유학생들은 마음이 가난할 수밖에 없다. 코스타가 유학생 전도에 기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센스티브한 청년기이기에 신앙과 함께 가치관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에 대해서도 결정적 영향을 줬다. 적지 않은 리더십들이 한국 여기저기 흩어져 우리가 기대하고 기도했던 대로 좋은 리더십들이 많이 나온 것 같다. 남북 평화통일에 기여하고 있는 윤영관 서울대 교수는 하나의 샘플이라고 할 수 있다. 코스타가 상시적인 기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유학생들에게 꾸준히 영향을 미쳐온 것을 감사한다. 한국의 학생운동이 침체기를 맞아 힘들어하고 있다. 이들에게도 코스타가 활력을 줘왔고 앞으로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창기 코스타를 돌아보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홍 목사=당시 한국의 대학가는 독재정권과 투쟁하느라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도 열악했다. 특히 87년 6월 초순에 열린 2회 수양회는 거의 통곡의 밤이었다. 기도하다가 울고, 다시 울다가 기도하고 그러면서 밤을 지새웠다. 한국에 돌아가서는 차를 몰고다니며 시위에 동참하곤 했다. 그리고 얼마 후 6·29 선언이 발표됐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코스타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된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목사가 목회하던 교회는 코스타를 잉태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굉장히 헌신적으로 코스타를 도왔다.

△이 목사=1회 수양회 때부터 5회 수양회 때까지는 거의 눈물로 보낸 시간들이었다. 조국을 떠난 유학생들에게 조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학생들도 열악하긴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강사들이 수양회 와서 돈을 내고 가거나 음식을 해왔다. 내가 목회하던 교회에서도 직접 김치나 반찬을 만들어 실어다 먹였다.

한국의 근세역사는 유학생들에 의해 리더십이 세워진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난 유학생들을 복음으로 무장시켜 조국으로 돌아가게 하면 그게 조국을 섬기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강조했던 게 신앙과 학문의 통합이었다. 조국의 각 영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복음 없이 돌아가면 안되기에 수양회 때마다 빼놓지 않고 강조한 게 ‘복음이란 무엇인가’였다. 수양회엔 해마다 20% 정도의 불신자들이 참여했다. 이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고, 신앙과 학문을 통합하도록 도전했다. 그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코스타의 대상과 지역이 계속 확대되고 있는데.

△홍 목사=일본에서 열리는 코스타는 한국 학생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학생도 참여한다. 한국 내 중국 유학생들이 차이스타도 열고 있다. 추석 명절 때마다 열리는데 음식 사먹을 데도 없는데 자기들끼리 모여서 수양회를 갖는다. 유럽 코스타는 독일 유학생들이 주축이 됐는데 UBF 출신들이 양육하던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온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코스타는 계속에서 새끼의 새끼를 치면서 성장해왔다.

△이 목사=지금은 25년 전과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조기 유학생들이 많아지고 이들에 대한 필요가 있다보니 유스코스타도 해오고 있다. 지역마다 부모들이 얼마나 후원을 잘해주는지 모른다. 심지어 강사비까지 지원해 준다. 영적인 치맛바람이라고 생각한다. 코스타 수양회 때는 해마다 베이비코스타도 같이 열린다. 유학생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수년 전 수양회 때는 초창기 베이비코스타에 참여했던 갓난아기가 이제는 대학생이 돼 간증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 코스타가 또 어떻게 진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코스타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복음주의 학생운동’이란 정체성이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 목사=코스타는 자원봉사자들이 주축이 돼 이끌고 있다. 당분간은 조직보다는 무브먼트(운동)로 존속할 것이다. 난 몇 년 후 코스타가 없어져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만큼 하나님의 때까지는 계속 쓰실 거란 얘기다. 코스타 처음 10년 동안은 이사장도 없었다. 의논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이다.

△홍 목사=그걸 위해서라도 한국 교회나 이민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민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마음이 가난하고 진지하다. 구도적 자세가 돼 있다. 앞으로 한국의 기독학생운동을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이들을 잘 끌어안고 그들의 잠재력을 잘 개발해줘야 한다.

-한국교회나 이민교회가 코스타에 참여하거나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은?

△이 목사=자원하는 마음과 섬기려는 자세만 있으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 물론 그 섬김이 자연스러운 건지 확증이 되어야 한다. 이번에도 코스타에 참석한 많은 강사들이 그냥 섬기기만 했다. 아무도 앞에 나서지 않으려 한다. 강준민 목사님도 10년 가까이 참석하면서 섬기기만 하다가 나중에 강사가 됐다. 나 역시 10년 동안은 섬기기만 했다. 실제로는 이렇게 헌신적으로 섬겨본 분들이 코스타를 돕고 끝까지 함께한다. 코스타의 이런 가치를 잘 따라줬으면 좋겠다. 영웅이 되려는 분들은 코스타와 함께하기 힘들다.

-기독청년들을 위한 다양한 모임이 있지만 코스타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이 목사=모든 강사가 사례비 안받고, 스스로 경비를 부담하며 참여한다. 부족하면 오히려 헌금을 내고 간다. 최근 한국에도 이런 모임이 몇 개 생기긴 했지만 코스타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오면 진정한 섬김이 있다. 강사나 자원봉사자, 학생 리더가 똑같다. 겸손과 함께 상대편을 향한 깊은 배려를 보여준다. 이것이 코스타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한다.

△홍 목사=코스타 수양회는 대접받으려는 강사들은 절대 올 수가 없다. 이것은 지금까지 코스타가 양질의 강사를 확보한 중요한 기준이 됐다. 전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자원봉사자들도 코스타만의 특징이다. 이들은 좋은 직장을 다니지만 때로는 해고를 각오한 채 1주일씩 휴가를 내고 참여한다. 그렇게 헌신적일 수가 없다.

코스타 초창기엔 오정현 목사(당시 전도사)가 일을 많이 했다. 송인규 교수도 초창기 일을 많이 했던 분이다. 중간에 김동호 목사도 참여했는데 코스타를 너무 너무 좋아했다. 손봉호 교수와 이만열 교수, 고 김인수 교수도 해마다 오셔서 강의하셨다. 코스타의 정신적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같이 평신도의 롤모델 같은 분들이다.

-예전과 비교했을 때 현재 코스타에 참석하고 있는 한인 유학생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홍 목사=그때는 참석자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다. 조국이나 장래에 대한 그런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근래 참석자들을 만나보면 다들 지금 현재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의 인간갈등이나 고민을 어떻게 풀까 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이 목사=요즘 젊은이들은 정보가 훨씬 더 많다. 창의적이고 샤프하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은 헌신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거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야성이 약하다.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포기한다. 예전엔 목회자나 선교사 헌신자가 많았는데 풀타임 사역자에 대한 헌신이 떨어졌다. 현실에 대해 너무 이해타산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코스타가 5년 전 수양회에서 민족이란 개념을 열방으로 확대했다. 지경을 넓힌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만큼 통일에 기여할 일꾼들이 사라진다는 의미도 있을텐데.

△이 목사=코스타는 몇 번에 걸쳐 발전적 변화를 해왔다. 코스타는 ‘KOrean Students in America’였는데 나중엔 그 A가 Abroad로, 지금은 All nations로 바뀌었다.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디아스포라로 그 나라에서 한국인으로서 사는 게 오히려 하나님나라의 확장에 기여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은 바람직한 애국의 새로운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민족과 세계선교는 둘 다 중요하다. 국수주의가 아닌 건강한 민족 정체성을 가질 때 세계선교도 잘 할 수 있다. 이번에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코스탄들을 만났다. 그들은 ‘코스타에 와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는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코스타의 역할은 앞으로도 클 것이다.

△홍 목사=한국 교회가 앞으로 주도적으로 해야 할 책무가 통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통일은 다른 것보다 남북간 중재자 역할이 중요하다. 그걸 교호가 해야 한다. 코스타 출신 윤영관 교수도 초창기 남북나눔운동 연구위원으로서 독일이나 베트남, 예멘 등 전세계 분단 현장을 직접 가서 연구했다. 지금은 한반도평화연구원을 통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매달 주제 발표를 한다. 아마 남북 통일과 관련한 민간단체 싱크탱크 중에 한반도평화연구원처럼 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을 주도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필요한데 코스타 출신들이 지금까지 많이 해왔다. 옌벤과기대의 다수가 코스타 출신이고, 한동대와 몽골 국제대도 마찬가지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도 코스타 수양회 마지막날 선교 헌신을 통해 하버드 학위를 내려놓고 선교사라 나갔다. 나는 이것이 거대한 크리스천 지성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온 초창기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도 20대 지성이었다. 헨리 마틴이나 저스틴 선교사도 다 대학생 때 헌신했다. 이런 기독 지성들이 세계선교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다. 좋은 리더십들이 민족 장래를 위한 일꾼으로 쓰임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시카고=글·사진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