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서고’서 잠자던 전쟁문학을 깨우다… 이승하 교수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입력 2010-07-09 17:42
6월의 달력이 한 장 넘어갔다고 해서 6·25전쟁 60주년이라는 역사적 의미의 지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전쟁을 기억하는 힘에서 평화를 지향하는 인간 내면의 의지는 더욱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우리 문학사에서 6·25전쟁 기간 중에 발표된 시들은 외면 받아왔다. 예컨대 한국현대문학사는 ‘해방 직후의 시’ 다음 장이 ‘전후의 시’다. 간혹 ‘전쟁시’라는 이름으로 학계에서 전쟁 시기에 발표된 시편들을 자리매기는 일이 있었을 뿐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이승하 교수(50·중앙대 문예창작학과)가 펴낸 ‘한국문학의 역사의식’(문예출판사)은 이런 공백을 메울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
“청청 우는 엠원의/총소리는 깨끗한 것/모조리 아낌없이 버렸으므로/비로소 철(徹)한 인격……/그것은 신격(神格)의 자리다/그런 맑은 쇳소리./아아 나는 전선이 비롯되는/어느 산머리에서/산이 오히려 기겁을 해서/무너지는 맑은 소리에/감동한다.”(‘총성’ 전반부)
박목월 시인이 ‘전선문학’ 4집(1952년 7월)에 발표한 이 시는 이 교수가 처음으로 발굴 공개한 작품으로 흔히 총성을 듣고 기겁을 하는 나약한 심상에서 벗어나 비록 총성 속에 살육이 전개될지언정 산을 울리는 그 소리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쩡, 스르르청/엄숙한 것에서/한결 모질게 이룩한/바르고, 준엄하고, 높고, 깨끗한/뜻의 소리/아/엠원은 쩡 스르르청/不正한 것의 가슴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그 영혼을/꿰뚫고, 바수고, 깨고, 차고/깨우치려 가는 것이다”(‘총성’ 후반부)
총성을 영혼을 울리는 소리로 객관화한 박목월의 인식이 비범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런 명편의 시가 ‘전쟁시’로 치부되어 퀴퀴한 서가에 처박혀 있었던 시간이 60년이나 된다는 점은 현대문학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꽉 차 있어야할 전쟁문학이 텅 비어있는 것이다.
포탄이 오가는 전쟁터에서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사치일 것 같은 6·25전쟁 수행기에도 시인들은 ‘종군작가단’에 소속되어 시를 썼다. 때로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기 위해, 때로는 군인과 국민의 사기를 앙양하기 위해, 때로는 종전과 평화를 갈망하면서. 그리고 그들의 시는 사람들을 움직였다. 그것이 문학의 본령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 목적성이 고발문학이랄 정도로 분명하고 현실적인 것이라서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 문학사의 크나큰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일례로 ‘전선문학’에 실린 박목월의 ‘총성’과 천상병의 ‘무명전사(無名戰死)’를 우리 문학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이승하는 꼬집는다.
그뿐 아니다. 4·19 직후 김춘수 시인이 쓴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과 성찬경 시인의 ‘영령(英靈)은 말한다’도 제대로 평가받아할 작품이다. 이 교수는 그 이유에 대해 “역사적인 사건인 4·19혁명을 다뤘기 때문이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은 시’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그대들 가슴 깊은 청정한 부분에/고이고 또 고였다가/(중략) 1960년 4월19일/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잔인한 달 4월에/죽었던 땅에서 라일라크가 피고”(‘이제야 들었다, 그대들 음성을,’ 전반부)
엘리엇이 쓴 ‘황무지’의 유명한 첫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김춘수의 이 시는 부정선거 재실시를 요구하다 죽은 학생들의 영령을 추도하고 총기난사로 죄악을 덮으려 한 위정자의 폭력을 규탄하고 있다. 이 교수는 “시위대열을 향해 총기 난사를 명한 경찰 수뇌부에 대해 의분에 차 이런 시를 쓴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우리가 시간이 흘러 그 시절에 쏟아져 나온 현실참여적인 문학작품에 대해 평가절하하는 것은 또 다른 왜곡”이라고 말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김남주도 김정환도 ‘민중시’를 쓰지 않았겠지만 1980년대의 이성복과 황지우와 박남철도 ‘해체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지다. 그러한 시 형식의 변용은 바로 시가 가진 속성, 즉 ‘시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지론이기도 하다.
“여기는 초토입니다//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이제 울음소리도 없습니다//파리 여러분!//이 향기 속에서 살기에 유의하시압!”(황지우의 ‘에프킬라를 뿌리며’ 전문)
광주가 군사작전으로 진압된 이후의 절망적인 분위기를 ‘초토’라고 표현한 이 시는 1981년 12월 발간된 무크지 ‘시와 경제’ 1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교수는 “문학에는 시대를 증언하고 역사를 반추하는 힘이 있다”며 “가장 현실적인 문학이 가장 위대한 문학이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사가 ‘민주’ 혹은 ‘자유’라는 바른 길을 향해 흘러가지 않을 때조차 우리의 문학은 큰 흐름을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역사적 시련 앞에 시인들은 용감했다.” 시인이 먼저 울면 그 시대는 난세가 아니고 무엇이랴.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