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염성덕] 국방부 기자와 육군 소장
입력 2010-07-08 18:06
“작전계획 5027 북한에 넘기는 將星 두고 국가안보 이야기할 수 있나”
“필기도구나 녹음기, 카메라를 지참하면 안 됩니다.” 느닷없이 국방부 대변인이 출입기자들을 모아 놓고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제1차 북핵 위기가 몰아치던 1994년 3월 남북 실무대표회담에서 북한 박영수 단장이 “전쟁이 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위협해 남한이 발칵 뒤집힌 직후인지, 그해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해 북한 정정이 불안하던 때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6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헌병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국방부 지하벙커에 있는 지휘통제실. 국방부는 그곳에서 출입기자들에게 한국과 미국이 북한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작성한 ‘작전계획 5027’을 이례적으로 공개했다. 지휘통제실은 천안함 폭침 사건 때도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비밀 장소로 분류된다.
출입기자들은 작계(作計) 5027의 내용을 대학 입시 준비하듯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74년 처음으로 작성된 작계 5027은 한·미연합군의 신속억제전력 배치, 북한 전략목표 파괴, 북진과 대규모 상륙작전, 점령지 군사통제 확립, 한반도 통일 등 방어·반격·수복작전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이뤄져 있었다. 전면전을 전후해 해외에 있는 미 함정, 항공기, 해병대 등 각종 장비와 병력이 순차적으로 증파된다는 것이 골자였다.
시차를 두고 개정판이 나오는데, 현 작계 5027에는 미군이 전쟁 발발 90일 안에 병력 70만명 안팎, 5개 항공모함 전단을 비롯한 함정 160여척, 항공기 2500여대 등을 한반도에 파견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방부는 남북 간 대치로 흉흉해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휘통제실과 작계 5027을 공개한 것이다. 당시 서·남해에는 해외 탈출을 계획했다는 사람들의 예약이 몰려 고깃배가 없을 정도라는 괴소문까지 돌았다.
출입기자들은 작계 5027의 간단한 내용만 보도했다. 일간지를 통해 작전계획의 일부를 접한 잡지사들이 전체 내용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출입기자들은 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전시 작전계획이야말로 극비로 취급돼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신문사 후배 기자가 국방부 기자실로 전화를 했다. “전쟁이 나면 휴전선 이북에 있는 북한군이 어떻게 공격하고, 한국군은 어떻게 격퇴할 건지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나요? 전시 전방에 있는 한국군의 대응태세를 다룬 상세한 자료를 입수했어요.” 이 자료는 군 관련자가 국회 상임위의 한 의원에게 구두로 설명한 것을 보좌관이 요약해 후배에게 준 것이었다.
“그걸 보도하면 주적(主敵)에게 한국군의 작전계획을 알려주는 셈인데, 국익에 배치된다고 봐야지.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 후배는 국민의 알권리와 지켜야 할 군사기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보도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후배와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방부 검찰단의 소환조사까지 받았다. 아마 군사정권 시절이었으면 호된 고초와 시련을 겪었으리라.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군의 기강해이, 비리사건, 각종 사고 등에 대해서는 엄하게 질책하지만 안보에 관한 한 군인의 입장에서도 생각하는 반군반민(半軍半民)의 자세를 취했던 것 같다. 출입기자들의 안보관이 이 정도인데 현역군인의 안보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최근 육군 장성이 군사기밀을 북한에 유출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 당국에 따르면 육군 소장 김모씨는 북한에 포섭된 전직 대북 공작원 박모씨(일명 흑금성)에게 작계 5027의 일부를 설명해준 혐의(군사기밀보호법 위반)로 구속됐다. 김 소장은 제대별 운용·편성 계획 등을 담은 작전교리와 야전교범을 전달한 혐의도 받고 있다.
작계 5027은 국가 안위,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작전계획이다. 군사기밀의 일부를 북한에 넘겨줬다는 것은 지탄받아 마땅한 이적행위다. 군사재판과정에서 김 소장의 혐의가 낱낱이 밝혀져야 하고, 혐의가 맞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군은 이번 기회에 군사기밀이 새지 않도록 철저한 사전·사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