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 가족 두번 운다… ‘주위 시선·재범 우려’ 도망치듯 삶의 터전 떠나
입력 2010-07-08 18:12
성폭력 후유증에 시달리는 피해자 가족들이 일터와 학교를 포기한 채 살던 곳을 떠나고 있다. 재범 우려와 따가운 시선 탓에 과거를 모르는 곳, 좀 더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피해자 보호에 소홀한 수사 방식을 지적하면서 ‘조용한 지원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서울 장안동 성폭행 피해 아동 A양의 어머니는 최근 다니던 봉제공장을 그만뒀다. 사건 발생 열흘 전 얻은 일자리였다. 사건이 나고 처음 얼마간 공장에 나오던 A양 어머니는 피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발길을 끊었다. 직장 동료는 8일 “먹고살기 힘든 사람이 오죽했으면 직장까지 그만뒀겠느냐”고 했다.
A양 가족은 전세로 살던 집도 내놨다. 한 이웃은 “아픔을 치유하려면 (아픈 과거를) 모르는 곳에 가야 하지 않겠느냐”면서도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일가족이 한순간 삶의 터전을 잃은 셈이다.
김수철 사건의 피해자 B양의 가족은 딸이 퇴원하는 대로 집과 학교를 옮길 생각이다. 이들의 법률대리인 민웅기 변호사는 “전세기간이 남은 데다 부유한 형편이 아니어서 쉽지는 않겠지만 집이 안 나가더라도 이사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B양은 한 달 이상 치료를 더 받아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에 일어났던 성폭행 사건 피해자 대부분도 다른 지역으로 거처를 옮겼다. 2008년 봄 대구에서 변을 당한 초등학생의 가족은 비난하는 듯한 시선과 수근거림 때문에, 지난해 여름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만난 30대 남성에게 성폭행당한 여중생의 가족은 주변 눈총 탓에 이사했다.
동정이든 호기심이든 주변에서 별 생각 없이 던지는 눈길은 피해자 가족을 괴롭힌다. 피해자가 당할 만한 짓을 했다는 식으로 소문이 나거나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던 것처럼 비쳐지는 일도 있다.
범인 검거에 치중하는 경찰 수사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B양의 경우 당시 경찰이 범인을 잡겠다며 B양을 데리고 범행 현장을 찾으러 다니는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이웃에 알려졌다.
피해자 가족에겐 드러나지 않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해바라기 아동센터 관계자는 “아동 성폭력은 아이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전학할 때는 이유를 알리지 않고 학교를 옮겨주는 ‘비밀 전학’ 제도를 활용해 피해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인 신의진 연세대 교수는 “정신적 충격을 완화할 수 있도록 부모에 대한 심리치료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강창욱 김수현 최승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