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 “봐줄만큼 봐줬다”… 현대그룹 “물러설 수 없다”

입력 2010-07-08 21:30


채권단의 신규대출 중단으로 현대그룹이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을 거부해온 현대그룹에 대한 압박이 본격화된 것이다. 현대상선, 현대증권, 현대엘리베이터 등 현대그룹 12개 계열사는 자금줄이 막혔다. 신규 투자가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 계열사들의 신뢰도도 타격을 받게 됐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현대건설 인수 역시 전망이 불투명해졌다.



◇“입장 불변” vs “봐줄 만큼 봐줬다”=현대그룹은 채권단의 결정에 단호하게 맞섰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8일 “우리 입장은 이미 발표한 대로”라며 “채권단이 이번 결의대로 실제 행동에 들어가는지 지켜보고 향후 조치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현대그룹은 주력 계열사 현대상선이 2분기 깜짝 실적을 발표한 지난 6일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과 거래를 끊고 주채권은행을 변경, 재무구조 평가를 다시 받겠다”고 밝혔다. 현대상선이 2분기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실적을 올렸기 때문에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맺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 지난달 이미 외환은행 차입금 1600억원 중 400억원을 갚았다고 강조했다. 현대그룹의 여신 규모는 2조5000억원으로 알려졌다.

반면 채권단은 지금까지 3차례나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시한을 연장해준 만큼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외환은행 관계자는 이날 “시한을 3번이나 연장해준 것은 현대그룹과 40년간 금융거래를 이어온 입장에서 최대한 배려해준 것”이라며 “그렇지만 무한정 연장해줄 수 없기 때문에 신규대출 중단이라는 카드를 꺼냈다”고 말했다.

물론 채권단 내부에서는 상생 차원에서 한 차례 더 연기해주고 설득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관계 악화 등으로 그룹이 휘청거리는 마당에 채찍을 들기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주채권은행 변경을 시도하자 채권단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현대건설 인수 어려워질 듯=현대그룹이 그동안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을 거부해온 것은 사실상 현대건설 인수 때문이다. 현대그룹은 현대상선에 의존하는 사업을 다각화하고 시너지 효과를 높이기 위해 현대건설 인수를 적극 추진해 왔다. 하지만 채권단과 재무구조 개선약정을 맺게 되면 부채감축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한다. 부실기업이라는 낙인에 차입금리가 올라 부담도 커진다.

따라서 추정가격 3조원 이상의 현대건설 인수를 적극 추진해 오던 현대그룹으로서는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다. 사내 유보금이 구조조정에 쓰이게 되면 ‘실탄’ 확보에 비상이 걸려 현대건설 인수 기회가 현대·기아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범(汎) 현대가에 돌아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이 현재 보유한 현금 유동성은 1조4000억원 규모로 알려졌다. 즉 주채권은행을 바꿔 재무구조 평가를 다시 받은 뒤 기존 유동성에 외부 투자액을 더한다면 현대건설 인수가 충분하다는 복안이었다.

하지만 이번 채권단 결정에 따라 현대그룹은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주력인 해운업 특성상 은행대출을 받지 못하면 신규 선박 발주 및 인도가 불가능해진다. 계열사들이 당장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은행 금융이 막히면 투자가 멈추고 기존 사업 추진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특히 채권단이 여신 회수 등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경우 현대그룹은 자금난으로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를 포기해야 한다. 현대상선 경영권도 위협받게 된다. 현대상선 지분 8.3%를 보유한 현대건설이 범 현대가에 넘어가면 범 현대가 지분은 40%에 달해 총 46%의 지분을 가진 현대그룹(우호 지분 포함)에 도전이 가능하다. 업계 관계자는 “신규대출 중단만으로도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는 어려워진 셈”이라고 말했다.

최정욱 고세욱 기자 jw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