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드로잉-뉴욕의 거지들’ 펴낸 이정한 美 뉴저지 주립 스탁튼대 교수

입력 2010-07-08 17:45


“막차 놓친 뉴욕 팬 역, 밤새 나만의 커다란 작업실이었죠”

“뉴욕의 거지들을 소재로 드로잉 하면서 난 그분들과 수없이 많은 대화를 했고, 거대한 산업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소외된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제게 이 책은 그림으로 쓴 일기나 마찬가집니다.”

불혹에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접고 예술에 입문하기 위해 훌쩍 미국으로 건너간 이정한(53) 교수에게 뉴욕은 단순한 메트로폴리탄이 아니다. 드로잉의 원천지이자 꿈과 희망을 잃지 않게 해준 훌륭한 반면교사다.

“종종 막차를 놓쳐 밤새도록 34가 뉴욕 팬 역에서 새벽 첫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곳은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커다란 작업실이었고, 뉴욕의 거지들은 나의 전속 모델이었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의 귀중한 고객들이었습니다.”

그의 첫 저서인 ‘365일 드로잉-뉴욕의 거지들’(작가출판사)은 읽지 않아도 되는 특이한 책이다. 한 장 한 장의 드로잉을 넘기는 것으로 이해가 너끈하다. 선 하나하나에서 힘이 넘치는가 하면 어떤 그림은 아주 섬세하고 여성스러워 마치 음양이 잘 조화 된 우주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른바 홈리스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본 인간군상에서 문명의 그늘을 발견해가는 그의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거리의 악사를 들여다보면 그들은 구걸하기 위해서 연주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홈리스 자체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낙관주의를 엿보게 한다.

마흔 이전엔 정치와 사업 쪽에 잠시 몸담은 적이 있었다는 그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씨의 외손자다. 국제펜클럽회원이자 시인인 장병혜(80)여사가 어머니다. 유년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지만 집안 분위기는 아무래도 예술가의 꿈을 키우기에는 사뭇 준엄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부산고교 재학 당시 미술반이었던 그는 학교 선배 박재동 화백 등과 어울려 야외스케치를 가던 젊은 날의 추억을 붙들고 나이를 먹어갔다. 그러다 1996년 봄, 과감히 고난의 유학길을 선택했다.

“화장실에서 남몰래 많이도 울었지요. 뉴저지 시튼홀 대학시절, 매주 금요일부터 일요일이면 뉴저지 트랜짓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가는 길에 땀과 목탄 그리고 물감으로 뒤범벅이 되어 내릴 곳도 잊은 채 드로잉을 했어요.”

뉴저지 주립 스탁튼대학 비주얼아트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늘 손때 묻은 조그마한 스케치북을 끼고 다닌다. “제가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의 화실이고, 작업이요. 내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귀중한 소재이죠.”

10층 높이의 필라델피아 시청사 벽화를 제작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드로잉의 힘이라고 말하는 그는 9일부터 14일까지 서울 대학로 공간 루에서 ‘드로잉 365일’전을 연다(02-765-1883).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