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대원 (4) 대학생 선교하며 조국재건 열정 느껴

입력 2010-07-07 17:52


하나님은 작은 권리를 포기하면 큰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제일 싫어하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바꿔 주시는 분이시다. 나에게 권리 포기는 음식부터 시작됐다. 지금은 한국음식을 너무 좋아하지만 처음엔 입에 맞지 않아 금식하는 날이 많았다. 이런 내가 김치찌개를 제일 좋아하게 된 사연이 있다.

전주에서 여름 대학생 수련회가 10일 동안 열렸다. 첫날 저녁식사로 김치찌개가 나왔다. 맵고 뜨거워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금식하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사정을 모르는 학생들은 나를 경건하고 거룩하게 바라보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김치찌개가 나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나님께 “하나님 너무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느냐? 그냥 먹어라”고 하셨다. 그래서 먹을 권리를 포기하고 힘들어도 그냥 먹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음식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자 억눌림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작은 것에서 해방되니 다른 것에도 자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작은 것이 크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분명하다면 권리를 포기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음식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을 즐기며 한국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고향 생각도 잘 안 날 정도였다.

광주에서 선교하던 우리의 마음은 서울에 많이 가 있었다. 하루 빨리 서울에 가서 대학생선교를 하길 원했다. 그 무렵 김덕영 권사님이 서울 공대에서 함께 기독학생회를 이끌자고 제안했다. 1967년, 우린 서울에서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학생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다. 김 권사님은 독립문 부근에서 사업을 크게 해서 많은 교회를 설립한 분으로 청량리 인근의 6개 대학(서울공대, 서울여대, 육군사관학교, 시립대, 경희대, 외대)에 기독학생회를 설립했다.

서울공대 기독학생회는 다른 학생단체와 달리 독립적이었다. 68년부터 서울공대에서 매주 설교하며 성경공부 인도와 기숙사 심방을 했다. 기숙사의 사랑방을 커피숍으로 만들어 학생들과 교제했다. 우리는 대학교 건너편에 있는 공릉동에 살면서 캠퍼스 내 학생들에게 선교했다. 학생들은 기숙사보다 우리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곧 학생들이 먹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함께 먹는다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또 기독학생들이 전도와 조국의 재건에 대한 큰 소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함께 사역한 김 권사님은 성령 충만한 분이었다. 그분은 “나는 엘리야가 승천 후, 갑절로 성령의 능력을 입을 엘리사가 후임으로 오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로스 당신이 엘리사처럼 되기를 사모하며 기도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당시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난 김 권사님이 돌아가신 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심정이었다. 학생들을 격려하고 위로해야 했는데 별로 말을 하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단지 “수고 한다” “평안이 있길 바란다”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을 했지만 별로 파워가 느껴지지 않았다. 좌절감을 많이 느끼던 시기는 계속됐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