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태원준] 월드컵 관전기
입력 2010-07-07 18:00
아직 결승전이 남았지만 남아공월드컵을 정리해보자. 한국의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 이미 숱한 평가가 나왔으니 정리할 것도 없다. 전국을 뒤덮은 거리응원, 이젠 월드컵의 공식이 돼버려 식상하다. 프랑스의 축구 청문회, 한 편의 코미디여서 그냥 보고 웃으면 되겠다.
천안함, 지방선거, 세종시 등 떠들썩한 이슈들이 대부분 잦아든 터라 월드컵은 지난 한 달간 거의 유일한 볼거리였다. 나름대로 즐겼고, 인상적인 다섯 장면을 꼽았다. 이것은 철저히 개인적 ‘인상’에 기초한 순위다.
5위에는 조별예선 아르헨티나전 염기훈의 왼발 슛이 올랐다. 후반 12분 이청용의 패스가 아르헨티나 페널티 에어리어 우측을 파고든 염기훈의 오른발에 닿았다. 골키퍼와 마주선 찬스. 세 걸음 더 가서 슛을 날렸다. 왼발, 오른발, 그리고 왼발 슛. 골대를 살짝 벗어났다. 그가 두 걸음 만에 오른발로 찼다면? 성공 확률이 더 높은 슛 각도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2대 2 동점이 됐다면 경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왜 굳이 왼발 슛을 택했을까.
궁금증은 다음날 인터넷을 뒤적이다 풀렸다. 염기훈의 오른발 엄지발가락엔 발톱이 없다. 여섯 살 때 자전거 바퀴에 엄지발가락이 끼여 큰 수술을 받은 뒤로 자라지 않는다. 오른발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된 오른발잡이가 왼발로 축구를 해서 국가대표가 됐다. 이날 왼발 슛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내린 결정이다. 십수년간 왼발을 남들 오른발처럼 쓰기 위해 단련해왔을 테니….
4위는 SBS 단독중계다. 축구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채널 선택권이 보장된 첫 월드컵. TV만 켜면 축구가 나오던 때보다 ‘월드컵 분위기’가 뜨지 못했다. 시청률은 2002, 2006년보다 낮고, 월드컵 시즌이면 주춤하던 프로야구 관중 동원도 순항했다. 그래서 이 실험은 반갑다. 사상 처음 원정 월드컵 16강에 올랐는데 분위기가 예전만 못하다면 과거 그토록 뜨거웠던 열기는 어쩌면 일부 강요된 게 아니었을까. 축구는 축구일 뿐임을 이미 간파한 사람들이 비로소 주눅 들지 않고 한 달을 보냈다.
3위는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감독의 귀향. 독일에 4대 0 완패할 때 “마라도나, 이제 끝났군” 했다. 핑계 댈 오심도, 브라질처럼 퇴장당한 선수도 없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중은 “디에고”를 연호하며 그의 귀국을 환영했다. 곧바로 해임된 카를로스 둥가 브라질 감독과 대조적이다. 마라도나는 10골을 터뜨리며 화끈한 공격축구를, 둥가는 지지 않는 수비축구를 했기 때문이란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팬들은 승리가 주는 감동보다 축구가 주는 감동을 더 원한다.
2위는 일본이다. 일본과 카메룬 경기 전반 38분. 일본 혼다 게이스케의 골이 터지자 차범근 해설위원은 “아시아 팀이 잘하는 건 우리에게도 반가운 소식입니다”라고 했다. 논리적으로 맞다. 일본이 좋은 성적을 내면 아시아 몫의 월드컵 티켓이 늘어날 가능성도 커진다.
그동안 축구에 일본이 끼어들면 항상 논리보다 감정이 앞섰다. 일본이 경기하면 누가 됐든 상대편을 응원했다. 차 위원 말은 이제 축구 말고도 일본보다 잘하는 게 많지 않으냐, 축구에서도 일본을 이성적으로 볼 때가 되지 않았냐는 물음으로 들렸다. 일본과 파라과이의 16강전. 처음으로 일본을 응원하려 노력하며 관전했다. 그런데 일본이 너무 재미없는 축구를 했다.
사연이 숨어있는 왼발 슛, 월드컵을 보지 않을 권리, 마라도나의 귀향, 일본 응원해보기. 이번 월드컵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 2∼5위다. 그럼 1위는? 두말 할 것 없이 우루과이 루이스 수아레스의 ‘신의 손’ 핸드볼 사건이다. 발로 하는 축구에서 저렇게 대놓고 손 쓰는 걸 본 적 있는가. 그 뻔뻔한 반칙이 결국 가나를 꺾고 우루과이를 4강에 진출시켰다. 심판은 퇴장과 페널티킥, 규정된 모든 벌칙을 줬지만 가나의 도둑맞은 승리를 되찾아주지 못했다. 축구는 논리적이지 않다. 그래서 재미가 있다.
태원준 특집기획부 차장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