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본 경부고속도… ㎞당 공사비용 일본의 10% 수준
입력 2010-07-07 00:37
경부고속도로는 2년5개월의 공사 기간동안 무수한 사연과 기록을 쏟아낸 대역사(大役事)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142달러에 불과했던 1967년 당시, 공사비만 429억여원에 달했다. 그해 국가 예산의 23.6%에 달하는 규모였다. 당시 정부는 휘발유세를 2배 인상하고, 도로국채 발행, 대일청구 자금, 통행료 수입 등으로 재원을 조달했다. 고속도로 건설에는 16개 건설사, 3개 군 공병단이 참여했다. 연인원으로 따지면 892만명에 달하는 공사 인력과 165만대의 건설장비가 투입됐다.
당시에는 도로공사 전문 인력은 물론 마땅한 건설장비도 없었다. 정부는 육군사관학교나 ROTC 출신 위관급 장교 등 군 인력과 공과대학, 공업고등학교 토목과 출신 교사를 교육시켜 공사 현장에 배치했다. 장비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의 중장비업체에서 외상으로 들여왔다.
초단기 도로공사 기간도 화제였다. 29개월의 공기는 일본의 도쿄∼나고야를 잇는 340㎞의 도메이고속도로 공사기간(7년)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 수준이다. ㎞당 공사비 역시 도메이가 7억∼10억원선이었지만 경부고속도로는 1억원 안팎이었다. 당시 시공사 대표였던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은 “주판을 엎어놓고 일했다”고 털어놨을 정도로 참여 건설사들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공사에 임했다. 촉박한 공사일정상 하루 3교대 근무는 기본이었다. 정 사장은 보통시멘트보다 20배나 빨리 굳는 조강시멘트를 비싼 가격에 사들여 사용해가며 공기를 단축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기공식을 9일 앞두고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 ‘1·21 사태’가 터졌다.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한 공사를 진행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공사기간 중에는 모두 77명이 목숨을 잃는 불상사를 겪어야 했다. 특히 최대 난공사 구간으로 꼽히던 대전 구간(70㎞)의 당재터널(현 옥천터널) 현장에서만 9명이 희생됐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