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대원 (3) 기독인 박해 대원군에서 이름 따와
입력 2010-07-06 17:31
한국에 도착한 후 서울 연희동의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 짐을 풀었다.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3개월 정도 머물렀다. 그러나 하루라도 빨리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싶었다. 서울 회현동 한옥집에 방 하나를 빌려 이사했다. 아름다운 한국인 가정을 만날 수 있었다.
나의 한국 이름 오대원은 그 한옥집 주인이던 오복균 장로님이 지어주셨다. 로스와 가장 유사한 발음이면서 오 장로의 성씨인 ‘오’씨가 됐다. 이름은 흥선대원군에서 따온 ‘대원’으로 지었다. 대원군은 굉장히 나라를 아끼고 사랑했으나 기독교인을 심하게 박해한 인물이었다. 역설적인 의미로 대원군과 반대로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엘렌은 오성애로 지었다.
엘렌과 난 처음부터 많은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우리의 첫 임무는 새로운 ‘조국’을 배우는 것이었다. 많은 고민을 했다. 한국 사람들과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론은 ‘파도 밑으로 온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오래전 하와이를 방문했을 때 해변에서 파도 타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높은 파도를 겁내지 않고 온몸을 던져 파도를 탔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서 시도했다. 문제는 내가 파도 타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보드 위에 꼿꼿이 서 파도를 만나자 거꾸로 바다에 빠져버렸다. 한 친구가 다가와 “파도 밑으로 다이빙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몸을 낮추고 넘실거리는 파도 밑으로 몸을 던지자 신기하게도 물에 빠지지 않고 평화롭게 파도를 탈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나라 한국에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잠수해라” “사람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 “섬기려는 사람들 밑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우리의 모토였다.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누비며 한국의 생활상과 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외국인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신기한 듯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당시 한국 풍경은 오래된 사진첩을 보는 듯했다. 한 손이 없는 상이군인을 보며 전쟁의 상흔을 느낄 수 있었고, 귀엽게 생긴 시발택시와 무지개가 그려진 버스가 기억에 남았다.
영락교회에 다니며 대학생 영어 성경공부를 4년 동안 인도했고 이때 담임목사이셨던 한경직 목사님과도 교제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한국어를 익힌 후 우린 남장로교 선교부의 지시로 전라도 광주에 가서 2년 동안 인턴십을 했다. 광주에서의 2년은 한국인들의 심성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당시 배사라 선교사가 사역하는 UBF에서 함께 사역했다. 우리는 광주에 있는 20개 고등학교에 고등부를 세웠고 캠퍼스 리더를 모아 귀납적 성경공부를 가르쳤다. 토요일 전체 모임엔 수백명의 학생이 모였다. 일주일에 4번은 고등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러 선교회 사무실에 왔다. 신발장에 80∼100켤레의 검정 고무신이 꽉 찼다.
우리 집에선 매일 오전 6시 영어 성경공부가 열렸다. 대학교수, 고교 교사 등 20∼30명이 모였다. 전남대에서 동양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영어를 배우려고 찾아왔다.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모임을 마칠 때 돌아가면서 영어로 기도했는데 한번은 내가 깜박 잠이 들었다. 깜짝 놀라 깨어 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 피곤해서 잠이 든 내가 깰까봐 사람들이 소리 없이 돌아간 것이다. 또 한번은 추운 겨울, 눈이 오는 날이었다. 늦잠을 잔 내가 후다닥 나가 문을 열어 제치니 30여명이 눈을 맞으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벨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리면 될 텐데, 내가 깰까봐 그냥 열어줄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미숙한 선교사를 이렇게 멋있는 분들이 양육해 준 것이다. 그들과 정이 많이 들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