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찬의 내가 만난 하나님 ⑥ 이재철 목사의 '나의 고백', 벼락이었다

입력 2010-07-05 11:22


이재철 목사의 <나의 고백>, 벼락이었다.

저는 50여년이나 살아왔던 세상과 작별하여야만 했습니다.

대학문을 나온 이후 저는 줄곧 공공성을 가지는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만큼 사회적 책임에 대해 성실한 자세로 살아야 했습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는 출판사를 했습니다. 신학자 에밀 브루너의 <정의 사회질서>를 시작으로, 박완서 선생님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김홍신 형의 <도둑놈과 도둑님>,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평민서당>이란 학술문고, <평민의 시> 등 130종의 책을 펴낸 <평민사>를 기억하시는지요? 제가 1976년에 만들어 1984년까지 제 젊은 영혼을 바친 일터였습니다. 매우 엄혹한 시기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출판행위는 하나의 문화운동이었으며, 변형된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원, 경찰서 정보과 형사 등의 눈에 보이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 속에서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압박하는 이상한 공기를 호흡하여야 했습니다. 제가 내는 책들이 운동권의 교과서라는 <청와대 무슨 수석>의 판단 때문에 휴업의 압력도 공공연히 받았었죠. 판매금지를 당한 책도 제법 여러 종이며, 역사 잡지 <한가람>은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한 채 폐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재무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정리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당당함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폭압의 시대에 온전한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시대에 맞서 싸웠다는 자부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방송 일을 한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방송언론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에 성심을 다하고자 하였습니다. 1987년 장마로 부여 등지가 물바다가 되었을 때에도, 제가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린 까닭에 방송국이 전전긍긍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른바 <땡전뉴스>가 살아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윗분 말 한마디에 행복과 불행이 갈리던 때였습니다. 제가 그랬죠. 부여는 물에 떴고, 수재민은 학교 강당에서 울부짖는데, 정치권은 호헌과 개헌 논의로 날이 새는 줄도 모른다고요. 대전스튜디오에서 방송 마치고 올라오는데, 피디가 초죽음이 되어서 일단 방송국으로 바로 귀사하지 말라는 국장 지시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날 서울스튜디오에는 당시 가나안 농장의 김용기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 어른 역시 강경하게 정치권을 비판하셨지요. 드디어 일이 터지는구나 하는 심정으로 우리 일행은 방송국 주변을 서성이기 두시간 쯤이 지났을까, 일이 잘 되었으니까 빨리 귀사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참 어이없는 일입니다만, 전두환 대통령께서 저희가 진행한 방송을 보고서 감동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사찰기관 사람들은 헛바람을 잡은 셈이 되었고, 방송국 높은 양반은 칭찬을 듣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우리 슬픈 시대의 초상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자랑 같습니다만, 태생적으로 제한이 없을 수 없는 방송이고, 시대적으로도 압박이 심한 상황이었지만, 최대한 방송언론의 본령을 지키려는 태도를 견지하며 일했습니다.

출판계에서 일하는 동안, 방송계에서 일하는 동안, 일로써 손가락질 받을 짓을 결코 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소신있고 깨끗하며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방송인이란 말을 들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언제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늘 옳은 쪽에 있다는 자만심이 제 속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간헐적으로 권력의 유혹도 있었습니다. 물론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거절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한 것이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양 하는 마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진정한 지성인이었으며, 진정한 방송인이었으면 어찌 그렇게 천한 교만에 빠질 수 있었겠습니까. 한마디로 아는 척, 잘난 척의 표본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천박한 교만이 세속적 탐욕보다도 못한 것인 줄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초연하지 못하면서 초연한 척 하는 것은 차라리 원초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원초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최소한 솔직함을 유지하고는 있는 셈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범법행위로 형벌을 받은 저는 축복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저는 아직도 가당찮은 교만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어둠이 어둠인 줄도 모른 채 까부는 저에게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50여년이나 살아왔던 세상과 작별할 수밖에 없게 된 저는 적어도 그 어둠에서는 벗어난 셈이니까요. 그러나, 익숙한 것과 작별하고 낯선 것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진통의 소산인 줄도 아시겠지요. 그것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어둠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제 이력서는 최악의 이력서가 되었습니다. 실로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자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의 문을 두드릴 때, 그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저히 열 수 없었습니다. 아는 척, 잘난 척으로 도배를 했던 자가 이번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어 세상 앞에 선 것입니다.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현실에서 도망칠 비상구도 없었습니다. 노숙자 아닌 노숙자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정한 일터가 없고, 일정한 수입도 없는 자가 가족을 부양하려면 구걸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지요. 염치불문하고 지인들을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까지 살 수 없었을 것임을 고백합니다. 결국 제가 당도한 곳이 여기라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의 여정이었습니다. 문득 거지가 되어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탕자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날도 겨우 돈의 구걸에 성공해 이사짐을 풀게 된 날이었습니다. 짐 속에서 굴러 떨어지는 책이 보였습니다. 제목은 <나의 고백>이었습니다. 제가 익히 잘 아는 이재철 목사의 자기고백서여서, 아내가 여러번 읽기를 권했지만 무감하게 던져두었던 책입니다. 다 아는 얘기 굳이 읽어 무엇하랴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 책에 손이 갔습니다. 그리고는 읽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가슴이 마구 떨렸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처절한 자기 고백을 하게 하였을까?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했을까? 그의 과거를 아는 저로서는, 그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도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자신을 세상에 던진 것에, 경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습니다. 아니, 그것은 저에게 벼락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저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에 너무도 심각한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거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습니다.

2010년 6월 30일 김종찬(전 KBS 집중토론 사회자, ‘희망의 소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