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피플] 싱가포르에 현대판 피사의 사탑 세운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입력 2010-07-04 17:57


“기술의 승리란 찬사보다 무사고 공사 더 기뻐”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신천동 쌍용건설 본사 10층 회의실. 김석준(57) 쌍용건설 회장이 임원회의에서 입을 열었다. “이 시간 이후로 MBS에 대한 기억은 싹 지워버립시다.”



싱가포르 정부의 최대 역점사업인 MBS는 쌍용건설이 시공한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Marina Bay Sands Hotel)의 약칭. 지상 55층짜리 3개 동으로 이뤄진 MBS는 2년 3개월간의 난공사 끝에 지난달 23일 문을 열었다. 특히 트럼프 카드 두장을 맞대어 마치 ‘들입 자(入) 모양으로 만들어진 MBS 건물은 피사의 사탑보다 10배가량 더 비스듬히 기울어 고난도 건축 기술의 보고(寶庫)로 통한다. 그런 건물을 개장 1주일 만에 시공사의 CEO가 임원들에게 “이 호텔을 머릿속에서 지우라”고 했다. 무슨 영문일까.

지난 2일 본사 집무실에서 만난 김 회장의 설명은 명료했다. “자신감은 갖되 자만하지 말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이번 공사와 관련된 각종 데이터베이스는 중요한 자산입니다. 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성공 추억에 파묻히거나 도취돼선 안 된다는 겁니다. 배우나 연기자들이 직전의 작품을 깨끗이 잊어야 차기 작품에 몰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27개월 만에 싱가포르의 랜드마크를 갈아 치운 MBS의 시공은 사실 김 회장에게 ‘정말 잊고 싶은’ 시간이기도 했다. 각 동의 한쪽 건물을 지상에서 최대 52도까지 기울여 23층까지 올려야 했던 1년 가까운 공사 기간은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나날이었다. 당시 쌍용건설의 시공 과정을 지켜보던 세계 건축 업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건물을) 올리다가 멈출 수밖에 없다” “멈추지 않으면 무너질 것이다.” 모두가 이렇게 바라봤다. 설상가상으로 해당 공정에 참여한 협력업체들도 “도저히 못하겠다”며 손을 들었다.

“40㎜짜리 철근을 심는 골조 작업이었는데, 철근 전문가들도 이런 가파른 경사면에 철근을 집어넣는 건 처음이라고 난색을 표하더라고요. 결국 협력업체만 3번 바꾼 뒤에야 성공했어요.” 김 회장은 당시 협력업체들이 공사를 포기한다고 했을 때 처음으로 “좌절감을 맛봤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깊은 절망감은 보약이 됐다. 기울어진 건물이 70m(23층) 높이에서 맞은편 건물과 성공적으로 연결되자 업계의 시선도 180도 달라졌다. 중동과 아프라카 등에서 ‘재벌’급 발주처 관계자들의 현장 견학이 줄을 이었다. “현장 브리핑룸은 1개밖에 없었는데 방문 팀들이 밖에서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많은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우리가 해 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MBS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기술과 집념의 승리’로 요약된다. 하지만 김 회장이 꼽는 최고의 찬사는 ‘무사고 공사’다. “공사기간 동안 하루에 최대 6000명의 인력이 투입됐습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건의 안전사고 없이 임무를 마쳤다는 데 남다른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30년 가까이 다져온 김 회장의 철저한 조직관리 노하우가 숨어 있다. 공사기간 중에 매달 2∼3차례씩 싱가포르를 찾은 그는 현장의 애로사항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같은 종류의 공사현장이라도 문제가 없는 현장은 없습니다. 그걸 반드시 찾아야 해요. 숨기면 곪아 터지거든요.” 이런 과정은 현장 임직원들의 격려 방식과도 연결된다. “우리 임직원들이 ‘무엇 때문에 고생하고 있구나’라는 걸 알아주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서 현장의 문제가 드러나니까요.”

김 회장은 인터뷰 내내 ‘기술’ ‘전략’ ‘상황 적응력’ 같은 단어를 수시로 꺼내 썼다. 급변하는 국내외 건설시장의 흐름과 무관치 않아 보였다. “건설업계의 저가 수주 경쟁시대는 끝났습니다. 피아(彼我)의 객관적 전략을 제대로 알고, 기술력을 무기로 변화무쌍한 상황에 얼마나 적응할 수 있느냐. 그게 살아남는 길입니다. 쌍용은 이미 그 길을 걷고 있고요.” 김 회장의 자신만만한 표정에서 그의 차기 ‘작품’이 뭐가 될지 궁금해졌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