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옥선희] 이안과 다아시

입력 2010-07-04 19:36


홈스테이로 여러 나라 사람을 맞았는데, 현재로선 포클랜드에서 온 이안이 가장 먼 나라 손님이다. 자연과 인물 사진을 찍으며 세계를 여행하는 사진작가 이안은 호주를 거쳐 한국으로 왔는데, 짐이 엄청났다. 카메라만 네 대에 각종 렌즈와 노트북까지 장비가 많았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다쳤다며 절뚝거리는 다리로 무거운 가방을 끌고 언덕 꼭대기 내 집을 찾아온 이안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북촌을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아픈 다리, 쌀 한 말 무게는 됨직한 카메라, 일흔 살 할아버지라는 게 믿기지 않는 열정이었다.



이국의 사진작가가 보는 북촌은 어떨까 싶어, 나는 이안에게 북촌 안내를 해주면서 그가 찍는 위치와 각도에서 북촌을 바라보았다. 내겐 너무 익숙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풍경에 그의 관심이 머물렀음은 물론이다. 즉 서울 소개 책자에 빠지지 않는 가회동 31번지 한옥 풍경보다는, 한옥을 수리하는 아저씨들이 둘러앉아 점심 먹는 모습에 관심을 기울였다.

펭귄이 노니는 해안가에 손수 지은 집에서 산다더니, 이안은 집짓기에 관심이 많았고 아는 것도 많았다. 흙을 개던 아저씨들도 파란 눈의 할아버지가 이것저것 참견하는 게 신기했던지, 즐겁게 포즈를 취해주셨다.

이안은 사진 책을 여러 권 냈는데, 촬영과 글은 물론 디자인에서 편집까지도 딸과 단둘이 해내고 있단다. 물론 돈 버는 일이 아니어서, 딸이 옷 사달라면 돈을 주지 않지만 카메라가 망가졌다면 돈을 준다며 웃었다.

오전 11시에 카페에서 마시는 진한 커피 한 잔이 이안이 누리는 사치의 전부였다. 그래도 이안은 행복해 보였다. 아직 못 가본 나라가 많고, 새로운 풍경과 사람을 기대하며 살기에.

다리 고통이 심해져 예정보다 일찍 귀국하게 된 이안은 나머지 홈스테이 비용까지 모두 입금해주었다. 내가 보고 싶어 했던, 한국에서 찍은 사진 일부를 파일로 보내주기도 했다. 근검절약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헌신하는 이안 할아버지처럼 살아야지 했다.

한국 여성과의 결혼을 앞둔 호주 아저씨 다아시는 은근한 유머 감각으로 나를 즐겁게 해주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는 그에게 한참만에야 ‘You’re Welcome’을 생각해 내는 나를 보곤, 자기도 일부러 한 박자 늦춰 ‘천만에요’라고 대꾸해 웃음바다를 만드는 식이다. 약혼녀로부터 못생겼다고 구박받는 게 안쓰러워,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주인공과 이름이 같으며, 다아시는 여성에게 인기 많은 캐릭터라고 알려주자, 약혼녀에게 우쭐대며 좋아했다.

한국어를 모르면서도, 내가 대학생을 이끌고 북촌을 안내하는 데 따라다닌 다아시. 영어로 설명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자 다아시는 가슴에 손을 대며 “여기로 들었다”고 했다.

사랑하는 이의 나라를 배우고 이해하려는 마음. 늦게 반려자를 만났지만, 서두르지 않고 진지하게 다가가는 그의 자세가 사랑을 깊고 굳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