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대원 선교사 스토리(1)

입력 2010-07-04 13:12


1961년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한 화물선 초타우(Choctaw)는 20일이 넘는 긴 항해 중이었다. 낡고 오래된 화물선은 수리를 위해 태평양 한가운데 이틀 동안 정박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광대하게 펼쳐진 태평양을 응시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육지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바다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있는 이곳이 어디쯤일까?”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우린 아직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 엘렌과 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받아 한국으로 가는 중이었다. 우린 하나의 문화를 떠나서 다른 문화권으로 들어가기 전, 잠시 여백의 시간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여백은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통해 선교에 대한 소명을 재확인했고, 인생과 선교에서 ‘여백(Space)’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여백의 시간을 가지세요”라고 강조하곤 한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가진 여백의 시간 속에서 선교의 핵심은 ‘하나님을 좀 더 진실 되게 만나기 위해 구하는 과정’이란 것을 알게 됐다. 내 안에 내(자아)가 너무 많으면 하나님이 계실 곳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우린 자신을 비워내야 한다.

당시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우리가 가야 할 곳은 한국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희망했던 선교지는 모슬렘 국가 이란이었지만 당시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가 선교지를 선택해야 할 시기인 1960년, 한국에서 4·19혁명이 일어났다. 세계 각국이 한국 대학생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미국 신문 1면은 불의에 항거하는 한국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한국 땅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국 대학생들이 나라를 위해 그토록 과감하게 일어설 수 있다면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한국을 선교지로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는 한국장로교 총회의 초청과 맞물려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는 결실을 맺었다. 1950, 60년대엔 단기선교란 개념이 없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그곳에 뼈를 묻을 각오를 하고 낯선 미지의 땅으로 떠났다. 아내는 25세였고 나는 26세였다.

3주 동안의 항해는 흥분되고 즐거운 여행길이었다. 바다는 너무 고요했고 우리는 멀미도 하지 않았고 피곤하지 않았다. 배에는 보성여고 교장선생님이셨던 김종순 장로와 2명의 가톨릭 수녀, 일본인 부부, 한국으로 가는 세 명의 다른 선교사들이 있었다. 주일엔 그들과 선원들이 함께하는 예배를 인도했다.

긴 항해 끝에 배가 인천항에 도착했는데 거센 파도 때문에 하선을 할 수 없었다. 새로운 땅을 밟기 위해 하루를 더 기다렸다. 우리의 마음속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컸다.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하나님. 저희를 이 아름다운 한국 땅에 보내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나라에서 한국인의 심장소리를 듣게 하시고 문화를 배우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게 하소서.”

그날로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한국에 보내주신 놀라운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감사드리고 있다. 정리=이지현 기자

누구인가=오대원 목사(David E Ross)는 1960년 버지니아 주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미국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1972년 예수전도단을 설립하고 1980년에 YWAM(Youth With A Mission)과 연합해 국내외적으로 사역을 감당했다. 1986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에서 한인 2세들을 위한 안디옥 커넥션사역과 북한 선교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