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평수 선교사 “여성 사역자도 부르실까란 의문… 이젠 깨달았죠, 그렇다는 것을”
입력 2010-07-01 20:51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사역자로 쓰시는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지만 한국 내 여러 교단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질문이다. 1974년 선교의 비전을 품고 남편과 함께 세계 최빈국으로 떠났던 여성이 있다. 그는 10년 후 갑작스레 남편을 잃고서 이 질문에 직면했다. “나는 그동안 선교사였는가, 선교사의 아내였는가?” 다시 26년이 흘렀다. 그는 “이제는 그 답을 안다”고 말한다.
고 정성균(1944∼1984) 선교사의 부인인 임평수 선교사의 이야기다. 부부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의 파송을 받아 10년간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에서 활동한 1세대 선교사였다. 이들의 후원을 위해 만들어졌던 방파선교회(회장 정종성 장로)는 현재 전 세계에 38가정의 선교사를 파송한, 국내 최대 선교회 중 하나가 됐다.
고귀한 희생의 열매는 이것뿐이 아니다. 임 선교사와 3남매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운 것이다. 임 선교사는 이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000년부터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큰아들은 보스턴에서, 딸과 작은아들은 LA에서 목사로 사역 중이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지난달 17일 방파선교회 10주년 행사 참석차 한국을 방문해 머물고 있는 임 선교사를 28일 만났을 때 그는 “남편을 잃은 상실감을 치유할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살았다”고 털어놨다.
정 선교사는 급성간염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임 선교사는 ‘오진으로 인한 의료사고’로 기억하고 있다. 사망 닷새 전 병원으로 갈 때만 해도 아들에게 “써둔 편지 꼭 부치라”고 할 만큼 건강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남편을 잃은 임 선교사에게 후원자들은 한국 또는 미국으로 가든 후임 선교사로 남든 계속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임 선교사는 그 선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한국 어느 교단이나 선교사의 아내를 정식 선교사로 보지 않았어요. 실제로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한국에서 나를 정식 후임 선교사로 인정하기 꺼린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이미 상처가 컸던 상태라 그간의 고생이 모두 허사인 듯 절망했어요.”
정신적 탈진으로 누워 있던 임 선교사는 어느 날 남편의 영정 사진이 확 다가와 ‘네가 일어나 입을 열어야 한다’고 말하는 체험을 했다. 그 후 방파선교회와 미주 한인교회 후원을 받아들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제가 신학을 공부한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성의 사역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그에 대한 답을 딸이 목회학 석사를 공부하던 시절 조언했던 이야기로 대신했다. 한 남학생으로부터 “여자가 왜 목사가 되려 하느냐, 교육학 석사를 따라”는 말을 듣고 의기소침해 있는 딸에게 “다음에 그 애를 만나면 어깨를 툭 치면서 ‘너는 왜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묻거라. 그가 소명에 대해 말하면 눈을 똑바로 보며 ‘그게 바로 내 답이다’라고 해라”는 것이다.
그는 몸소 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성경번역 전문가로서 2003년부터 6년간 인도네시아 중부 다약 부족에 들어가 스위스, 독일 대표와 함께 성경 번역을 도왔으며 지난 1월 미국 댈러스로 돌아간 뒤에는 성경번역 최종 감수자 자격을 위해 공부 중이다. 3년 내에 자격을 따 다시 해외로 나가는 것이 목표이고, 남편과의 사역을 책으로 낼 계획도 있다는 그는 “이제 내게는 ‘하나님은 사역자를 몇 살까지 쓰시는가’라는 질문만 남았다”며 웃어 보였다.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