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성혜영] 어떤 향기
입력 2010-07-01 17:39
“교토, 일본에 네가 있어 참 좋구나!” 교토 전철에 붙은 관광포스터의 글귀를 볼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크고 빠르고 새롭고 화려한 것들이 점령해 가는 시대의 바람이 여기라고 비껴갈까마는, 그래도 교토는 오랜 시간 만들어 온 한 도시의 정체성이 가장 잘 지켜지고 있는 곳 중의 하나다. 다른 지방들도 ‘작은 교토’를 표방하며 자기 고장을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교토에 대한 자부심이나 그 상징적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도(古都)의 명성에 걸맞은 오랜 전통과 문화가 그 중심에 있지만, 진짜 ‘교토스러움’의 정체는 단순히 시간성에만 있지 않다. 그 전통이 과거의 깃발을 휘두르며 현재를 압도하는 유령으로 군림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오래된 고목나무처럼, 필요할 때마다 그늘이 되어 주고 지혜를 빌려 주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교토만의 독특한 존재방식이 있다.
가와이 간지로(河井寬次郞, 1899∼1966) 기념관에서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요미즈데라(淸水寺)만큼 유명하지는 않아도, 그 주변이 교토 전통 산업의 한 축을 담당했던 도자기 촌이라는 것을 알 사람은 안다. 그곳에서 다시 길 하나를 건너면 관광객들의 발길은 뚝 끊기지만, 일본 근대 공예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예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가와이 간지로의 집이자 작업실이 있다.
조용한 주택가, 다부지고 엄정하지만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목조건물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즈넉하고 소박한 우주가 펼쳐진다. 삐걱거리는 마루의 촉감, 괘종시계의 똑딱임, 안마당을 스치는 바람, 다실의 화로, 의자가 된 절구, 나른한 고양이….
오감을 자극하며 먼 시간과 공간을 깨우는 것은 ‘예술품’이 아니라 곳곳에 배어있는 삶의 향기다. 물레는 멈추었고 마당 건너 오름 가마의 불꽃도 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마치 외출한 주인이 금방이라도 돌아올 듯 온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그곳이 가족과의 삶터이자 쉼터이고, 자신의 일터이자 친구들과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설계부터 구석구석의 가구까지 모두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었다는 집은 예술가의 안목과 생활인의 지혜가 돋보인다. ‘심도조신(心刀彫身)’. 칼로 새긴 듯 결기가 느껴지는 그의 글씨처럼, 마음을 깎고 몸을 다듬듯 흙으로 나무로 돌로 삶과 예술을 고민하며 민예운동을 이끌었던 곳이다.
‘일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일’이었다는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삶이 곧 예술이고 예술이 곧 삶이었던 그때 그곳은 지금 박물관이다. 크고 화려한 ‘화이트 큐빅’이 흉내 낼 수 없는 그 시간과 공간의 향기. 그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싶은, 간직해야 할 ‘오래된 미래’가 아닐까.
‘(중략) 잘 익은 이 세상의 사람 하나는/ 무릎 꿇고 그 향기를 하늘에 받았다가/ 꽃 피고 비 오는 날/ 뼛속까지 마음 시린 이들에게/ 고루고루 나눠주고 있나니.’ (이시영, ‘어느 향기’)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