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문일] 어느 인문학자의 부음

입력 2010-07-01 17:42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의 추사(秋史) 비판이 필자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안 교수는 최근 한국과 중국의 예술작품을 비교한 저서를 내면서 김정희 글씨가 중국의 왕희지체나 조맹부의 송설체보다 못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림 세한도(歲寒圖) 역시 너무 중국적이라고 비판했다.

예술작품의 우열을 가리겠다는 발상부터 납득하기 어렵다. 심미안은 결국 주관이다. 작품의 경지가 높을수록 우열보다는 개성을 평가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해박한 식견을 가진 누군가가 고금의 작품에 서열을 매겼더라도 다른 전문가의 눈에는 무의미한 행렬에 불과할 수 있다.

추사의 예술은 안 교수 같은 미술사가의 금강안(金剛眼)보다 예술을 취미로 즐기는 딜레탕트(dilettante)에게 더 잘 보이는 세계가 아닐는지.

“중턱이 부러진 노송의 정정(亭亭)은 그믐달의 광채 그대로다. 앙상하게 드리워진 한 가지는 아직 예전의 창창(蒼蒼)을 과(誇)하고도 남는 기세요, 거기에 어울려 그려진 세 그루의 소나무, 안마당에 서있는 한 그루는 사뭇 강태공처럼 의젓하고, 바깥의 두 그루는 주위 환경에 아랑곳없이 당당하다. 하늘과 땅이 백설로 한 빛이건만, 싱싱한 솔잎에는 절조가 드높다.”

적재적소에 한자어를 쓰되 한글로 주체를 세운 문장.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고인(古人)과의 대화’ 라는 수필이다. 필자의 세대는 거친 종이에 복사된 세한도를 이병주(李丙疇) 동국대 교수의 명문장과 함께 뇌리에 새겼다. 훗날 세한도의 실물을 봤을 때 글에서 얻은 감흥도 고스란히 살아났다.

“가람이 파라니 새 더욱 희고 / 산이 푸르니 꽃 빛이 불붙는 듯하다 / 올 봄이 보건대는 또 지나가나니 / 어느 날이 내가 고향으로 돌아갈 해인고”

이 교수는 ‘두시언해(杜詩諺解)’ 연구의 권위자였다. 고전 번역의 전범이라는 두시언해의 옛 한글을 이 교수가 현대 한글로 되살린 문장들은 요즘 시의 잣대로 재보아도 ‘모던’하다.

일주일 전 아침신문에 세 줄짜리 부음이 실렸다. △이병주(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씨 별세, 향년 90.

젊은 연예인의 죽음은 지면을 도배하고 국회의원 몇 년 한 사람도 얼굴사진을 실어 부음을 알린다. 독보적 업적과 문장을 남긴 원로 학자가 그보다 존중받지 못한대서야 이치가 어긋난다. 말로는 인문학의 필요성을 외치면서도 정작 학자의 가치를 알아볼 만한 내부구조가 우리 사회에 없는 것 아닐까 하여 씁쓸했다.

문일 논설위원 norw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