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의 시선] 재정 긴축, 지금은 아니다
입력 2010-07-01 18:09
자유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꾸려 13년 만에 집권한 영국 보수당 정부의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지난달 22일 ‘비상 예산’을 발표했다. 정부 지출의 가혹한 삭감과 증세를 통해 지난해 국민총생산(GDP)의 11%를 웃도는 재정적자를 2015년까지 GDP 1%대로 줄이겠다는 내용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 구제금융에 대한 조건으로 2014년까지 재정적자를 GDP 대비 14%에서 3%선으로 낮추겠다고 약속한 그리스나 국가신용등급이 자꾸 강등되는 것을 막기 위해 GDP 대비 11%인 재정적자를 2013년 3%까지 줄이겠다고 자청한 스페인과 맞먹는 고강도 긴축정책이다.
영국이 긴축 기조로 돌아서면서 세계적으로 재정적자를 빨리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힘을 얻게 됐다. 그리스 아일랜드 스페인 등이 이미 혹독한 긴축정책을 시작했지만 급박한 상황에 떠밀려 그런 것임을 모두 안다. 독일도 최근 정부 지출 삭감 계획을 발표했지만 항상 보수적으로 재정을 운용해온데다 재정적자가 GDP 대비 4%도 안 돼 파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함께 정부 재정의 확장 기조를 변호해온 영국이 180도 방향을 틀면서 긴축재정론자들이 분위기를 주도하게 됐다.
과연 현재 선진국들의 재정적자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며, 그 해결책은 하루라도 빨리 최대한으로 적자를 줄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선 지적할 것은, 이런 해결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재정적자 문제의 원인을 잘못 파악하고 있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재정적자가 전임 노동당 정부의 방탕한 공공지출(public sector splurge)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1997년 집권 이후 2007년까지 노동당 정부에서 영국 재정은 흑자를 기록한 적도 많고, 적자였을 때도 GDP 대비 3% 부근으로 큰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2008년 이후 영국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은 금융위기로 민간 부문 경제활동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세수가 급감했고, 정부가 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세수 급감에도 종전 수준으로 지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미국 등 대부분의 다른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선진국의 대규모 재정적자는 정부 지출의 과다가 아니라 민간 지출의 과소 때문이다. 모든 자원이 이용되는 완전고용 상태에서는 정부 지출을 삭감하면 그만큼 민간 지출(소비나 투자)이 늘 수도 있다(이것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사회간접자본이나 연구개발 지출을 줄이면 그와 관련된 민간 투자가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민간 부문 과소지출이 문제의 근원인 상황에서는 그 과소지출 원인이 해소되지 않으면 정부 지출을 줄인다고 민간 지출이 늘지 않는다.
우선 미국 영국 등 많은 나라들의 가계부채 비율이 매우 높다. 경기가 좋았을 때는 이 부채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금융위기가 터져 집값이 떨어지고 실업이 늘어나자 주택담보대출이나 신용카드 부채의 상환이 어려워 가계소비가 위축됐다. 이런 상황에서 긴축재정을 통해 실업보험 연금 주택보조금 육아보조금 등 복지 지출이 줄면 고소득층을 제외한 국민은 미래에 대해 더 큰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그들의 소비심리는 더 위축된다. 일부 긴축론자들이 원하는 대로 정부 지출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이자율까지 올린다면, 가계부채 상환 부담이 늘어 소비는 더 위축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정부 지출을 줄이면 민간 소비가 늘기보다 줄어들 확률이 높다.
기업의 투자는 어떤가? 정부 지출, 특히 복지 지출 등 소비성 지출을 줄이면 종전에 소비되던 자원이 투자, 특히 기업의 투자로 전용되지 않을까? 이것도 그렇지 않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 형성된 자산 거품을 등에 업고 무리하게 확장한 금융사들은 자기자본 비율이 낮아진 데다 그 과정에서 취득한 독성자산의 부도에 대비해 자본금을 비축해야 하기 때문에 대출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비금융기업들, 특히 투자에 있어 차입 의존도가 높은 중소기업들이 자금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지출을 줄여 투자가용자원을 늘린다 해도 신용 경색으로 그 자원이 기업 투자로 전환되기 힘들다. 게다가 정부 지출 삭감이 민간 소비를 더 둔화시킨다면, 설사 투자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다 하더라도 기업이 투자를 늘릴 이유가 없어진다. 이에 더해 경기가 나빠지면 독성자산의 부도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금융사 대출이 더 위축돼 투자가 더 어려워지고, 그에 따라 경기는 더 나빠지는 악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정부 지출을 급격히 줄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과다차입과 부실자산, 그리고 그에 따른 신용 경색이라는 근본 문제가 해소되기 전에 정부 지출을 급격히 줄이면 민간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기업 투자가 줄어 경기를 하락시킬 확률이 높다. 일단 경기가 하강하면 민간 소비와 투자는 더 줄고, 경기가 더 악화되는 악순환이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최악의 경우에는 경기하강 때문에 정부 지출을 삭감한 것보다 세수가 더 줄어 정부 지출을 깎았음에도 재정적자는 도리어 늘 수도 있다.
장기적으로 지나친 재정적자가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대로 하루빨리 재정적자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상책은 아니다. 특히 지금처럼 ‘몇 년까지 얼마를 깎는다’는 식으로 시간표를 정해 놓고 재정적자를 줄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정책 이정표를 미리 정해 놓는 것이 정책 신뢰성을 높여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이정표는 경제 성장이 얼마 동안 어떤 속도로 진행되는가, 가계부채가 어느 정도 줄어드는가, 금융사 부실자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는가, 은행들이 얼마나 기업에 대출하고 있는가 등 구체적인 지표들이 돼야지 ‘몇 년 몇 월’같이 경제학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지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세계 경제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을 제외한 선진국들이 모두 긴축 기조로 돌아서고 있으며 미국도 내부 긴축론자들의 압력으로 얼마나 버틸지 모르는 상황이다. 주요국 정책 입안자들이 ‘재정적자는 무조건 나쁘다’는 단세포적 사고에서 벗어나 냉정을 되찾고 지금의 문제에 대한 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하루빨리 만들어내지 않으면 세계 경제는 ‘더블 딥’ 정도가 아니라 1990년대 이후 일본식 장기 불황에 빠져들 수도 있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