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만 먹고 ‘맴맴’ … 엉덩이 9㎝ 줄었다

입력 2010-07-01 20:32


‘고기 마니아’ 강준구 기자의 채식 한달 체험

32년 삶을 돌아보니 좋아했던 음식이라곤 온통 고기뿐이다. 쇠고기는 물론 삼겹살을 비롯한 각종 돼지고기, 돈가스, 만두, 여러 종류의 햄…. 대학 시절 7년간 하숙하며 탕수육 통닭 족발 같은 배달음식도 섭렵했다.

그나마 건강을 유지한 건 초등학생 때부터 수영을, 대학생이 된 뒤로 스쿼시와 근육운동을 꾸준히 한 덕이었다. 그런데 취직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허다한 회식과 ‘취재용’ 저녁자리로 운동할 시간이 없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고자 헬스클럽에 등록해봤지만 한 달에 일주일도 못 가곤 했다.

언젠가부터 걸을 때 왼쪽 무릎이 조금씩 아팠다. “내가 너 먹는 것만 생각하면 속이 터진다.” 명절 때마다 부쩍 살이 올라 나타나자 어머니는 구박을 했다. 나를 태운 체중계 바늘이 마침내 90㎏(2004년 입사 당시엔 78㎏이었다)을 가리킨 지난 5월, 비로소 고민이 시작됐다.

세상을 대하는 다른 방식

“모든 아름다운 모피 뒤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피비린내 나고, 야만적이다.” 미국 채식주의자 영화배우 메리 타일러 무어(74·여)는 채식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시민단체 한국채식연합은 홈페이지에서 “단순히 먹을거리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꾸는 근본적인 원동력”이라고 채식을 정의했다.

채식이 삶의 방식이자 철학이라는 것이다. 동물의 ‘시체’를 먹지 않는 삶이 궁금했다. 그래, 32년간 ‘남의 살’ 먹을 만큼 먹었다. 회식 때마다 옷에 밴 고기 냄새에 질색하는 아내의 짐을 덜어줄 때도 됐다. 5월 18일, 무턱대고 채식을 시작했다. 목표는 한 달이었다.

고기와 해산물은 먹지 않되 계란과 유제품은 먹는 ‘락토-오보(lacto-ovo) 채식’을 하기로 했다. 계란과 유제품마저 금하는 ‘비건(vegan) 채식’은 도저히 버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국내외 채식주의자 다수가 락토-오보 채식을 한다.

이원복 한국채식연합 대표에게 몇 가지 식단 조언을 받아 아내에게 전달했다. 채식을 선언하자 가장 좋아한 건 장모님이다. 채식 첫날 새벽 같이 찾아와 푸성귀 밑반찬을 풀어놓고 된장찌개를 손수 끓여주셨다. 아내는 고기 냄새를 뺀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는 길에 문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서울 여의도 회사 주변에 고기나 생선이 아닌 음식을 파는 곳이 있던가? 김밥에도 햄이 들어가고 비빔밥에도 다진 고기가 들어가는데…. 취재원과 식사 약속은 어디서 잡지? 30대 직장인이 채식하는 게 가능하긴 할까?

고깃집에서 살아남기

“순대나 먹으러 갈까?” 부장이 저녁을 먹으러 나서며 말했다. 회의에서 채식 체험을 기사로 써보겠다고 보고한 지 3시간도 되지 않았다. 직장이란 이렇게 인정사정없는 곳이다.

“그냥 먹어요. 기사에 못 참고 먹었다고 쓰면 되지.” “너 채식한다고 우리가 봐줄 필요는 없잖아?” 동료들이 약을 올린다. 사면초가, 고립무원이다.

순댓집은 피할 곳이 없었다. 모둠순대, 양념순대, 찹쌀순대…. 이름은 달라도 모두 고기다. 여기에 수육이나 보쌈이 추가되고 순댓국까지 나온다. 채식 첫날의 각오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테다.

배추와 김치만 뒤적이다 궁여지책으로 밥을 시켰다. “고기 안 드시나 봐요?” 아주머니가 묻고는 주방에서 김과 깻잎무침을 내왔다. 밥 한 그릇 서둘러 비우니 서서히 포만감이 찾아오면서 고기 집는 손길이 별로 부럽지 않다. 부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정말 (고기) 안 먹네.”

채식을 시작한 지 10일째인 5월 27일 회사 대선배가 부원들에게 저녁을 산다는 연락이 왔다. 식당은 ‘한우관.’ 아무리 궁리해도 초대를 거절할 명분은 없다. 흐읍, 심호흡을 한 뒤 한우관으로 향했다.

테이블 구석에 앉아 밥 한 공기를 먼저 시켰다. 선홍색 한우가 눈앞에서 자글자글 익는다. 주변 공기는 벌써 구수하다. 불판에 고기를 올린 지 채 5분도 안 돼 패닉 상태에 빠졌다. 맞은편 동료가 종업원에게 “앞접시 좀 달라”고 했다. “뭐하게요?” “너 불쌍해서.” 그러더니 구운 마늘을 접시에 담아 건네준다. 이를 본 종업원이 서비스라며 계란찜을 내놓았다. 고추 상추 배추와 계란찜을 벗 삼아 한우관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다.

지난달 2일 밤늦도록 지방선거 개표 상황을 지켜보며 분주하던 편집국. 밤 11시쯤 심상찮은 냄새가 휘감았다. 야근자들을 위한 통닭과 훈제족발이 산더미처럼 공수돼 왔다. 지나는 사람마다 닭다리를 손에 쥔 사무실, 그건 거대한 ‘통닭지옥’이었다. 한우관에서도 버텨냈다며 의기양양해 하던 터였지만 넘실거리는 통닭의 향기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다음날 마감할 기사를 완성하고 가려던 계획을 접고 집으로 향했다.

채식 한 달간 딱 한 번 생선을 먹었다. 5월 22일 한국 최초 우주인에서 막판 탈락한 고산씨와의 저녁 장소가 횟집이었다. 본보 5월 14일자에 인터뷰가 실린 뒤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그가 몇 년째 단골이라는 횟집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거절할 수 없었다.

음식의 재발견

한 달간 먹은 음식은 대체로 이렇다. 단호박 오므라이스, 야채 볶음밥, 올리브유에 볶은 마늘 스파게티, 부추·열무 비빔밥, 인도식 야채 카레, 일본식 냉메밀, 청국장, 그리고 아내가 해준 토마토 샐러드 등 몇 가지 요리.

집밖에서 먹은 것 중 가장 즐거웠던 식사는 백반이다. 한식에는 참 많은 밑반찬이 있다. 한정식을 먹으면서도 주로 고기반찬만 손대느라 지나쳤던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어릴 적 깻잎무침과 싱싱한 무생채를 좋아했던 기억이 되살아났고, 갓 담은 겉절이와 묵은지의 차이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채식을 하며 가장 친숙해진 느낌은 공복감이다. 배가 터질 듯 먹어도 금방 꺼진다. 잠들기가 한결 편했다. 자는 동안 그리 뒤척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아침이면 식욕이 꿈틀대 빈속으로 집을 나서기 어렵다. 고기를 잔뜩 먹고 불어 오른 배를 두들기며 잠들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 운동을 해본 사람은 안다. 왼쪽 무릎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채식 25일째인 남아공월드컵 개막(6월 11일) 무렵, 고기의 유혹에 여간해선 흔들리지 않을 정도가 됐다. 가끔 고기의 질감이 그리울 때는 ‘콩고기(콩으로 고기 맛을 낸 음식)’를 사먹었다. 라면은 감자나 쌀로 만든 채식라면을, 만두는 야채만두를 먹었다. 날이 더워지면서 콩국수와 메밀국수를 주로 찾았다. 시원한 물김치와 보리밥도 있다. 팥빙수도 허기를 달래기에 좋고, 평양냉면 집에서 “고기 빼고 면 좀 더 주세요” 하는 데도 익숙해졌다. 여름은 정말 채식하기 좋은 계절이다.

몸이 변했다

채식을 시작할 때 몸무게는 90㎏이었다. 배꼽기준으로 배 둘레 101.5㎝(39.9인치), 허리둘레 88.4㎝(35인치), 엉덩이 둘레 110㎝(43인치). 한 달 만에 이 몸은 어떻게 변했을까.

몸무게는 88㎏이 됐다. 예상보다 변화가 크지 않다. 그런데 배 둘레가 97.2㎝(38.2인치), 허리둘레는 86.1㎝(33.8인치)로 한결 가벼워졌다. 엉덩이 둘레는 101.3㎝(39.8인치)로 9㎝쯤 줄었다.

취직할 무렵 샀다가 2년 전부터 허벅지와 엉덩이가 너무 끼어서 못 입던 면바지를 꺼냈다. 다리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헐렁하다.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어도 예전처럼 부담스럽지 않았다. 채식을 시작한 이래 가장 기뻤던 순간이다.

병원에서 받은 검사 결과는 더 드라마틱했다. 채식 전 검사에서 동맥경화와 지방간의 원인인 중성지방(TG·정상치 200㎎/㎗ 이하) 수치는 206이었다. 정상에 가깝지만 약간의 지방간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수치는 한 달 만에 147로 떨어져 완벽한 정상치를 보였다. 지방간을 측정하는 감마 GTP(정상치 73IU/ℓ)도 81에서 62로 줄었고, 혈중 콜레스테롤(정상치 130∼220㎎/㎗)은 194에서 180으로 감소했다.

곽경근 서울내과 원장은 “기간이 짧아 확실하게 평가하긴 어렵지만 채식으로 고지혈증과 지방간 증상이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 직장 동료는 “다른 건 모르겠는데 피부는 정말 좋아졌다”고 했다. 자잘한 여드름이 많고 번들거리던 지성피부가 바뀌었다. 세수할 때 느껴질 정도로 ‘점도’와 ‘탄성’이 좋아졌다.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가장 큰 단점은 쉽게 지친다는 것. 야근할 때도, 장거리 운전 때도, 지방 출장 때도 평소보다 힘겨웠다. 일주일이면 낫곤 하던 감기가 2주 이상 갔다. 이번 감기가 특히 독했을 수 있지만, 의사들은 채식이 장기적으로는 면역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고기, 다시 먹을까 말까

남아공월드컵 한국과 나이지리아 경기가 열린 지난달 23일. 통닭을 먹었다. 맛은 있는데 기분이 찜찜했다. 몸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까 봐 두려워서…? 분명히 그런 걱정에 닭을 집어 들기가 망설여졌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 기분의 정체는 뭐지?

채식주의자를 뜻하는 영어 ‘베지테리안(vegetarian)’. ‘vegetable(채소)’에서 파생된 말이지만, 채식주의자들은 ‘온전한, 건전한’이란 의미의 라틴어 ‘베게투스(vegetus)’와 연결짓기도 한다. 채식하는 삶이 바른 길이라는 자부심이다.

취재 중 만난 채식주의자들은 먹는 것만 바꿔도 세상이 바뀐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고기를 먹기 위해 지구 자원을 엄청난 속도로 소비하고 있다, 고기를 포기하면 자원과 환경이 보호된다, 무엇보다 채식을 하면 건강하다,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도 건강해질 수 있다….

채식을 시작할 때 이들처럼 살 생각은 아니었다. 고백하건대 ‘한 달만 참으면 맘껏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채식을 버텨낸 원동력이다. 그런데 한 달간 ‘고기의 유혹’과 싸우고 나니 이번엔 ‘채식의 유혹’에 빠졌다. 채식이 그렇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준다면… 고기, 다시 먹을까 말까?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