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찬의 내가 만난 하나님⑤ 바보 바보 바보
입력 2010-07-01 17:00
바보 바보 바보
2002년 8월 22일 밤,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51일만의 일이었습니다. 밤인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대명천지 밝은 곳에서 살기에는 이미 부적절한 인간이 되었으니까요.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살게 된 것을 감옥에서 사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제 가슴으로 밀려드는 깊은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저를 마중하기 위하여 달려온 아내와 후배에게 의례적인 말 이상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 밖으로 나온 것을 기뻐하는 아내에게도 미안하다, 고생했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습니다. 후배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올 것이고, 출감 소식을 들은 친지들은 전화를 해 올 것이고, 그때 그분들에게 나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떠오르는 말이 없었습니다. 이대로 아는 이가 전혀 없는 절해고도로 숨어버렸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제 표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내는 깊은 슬픔으로 빠져들고 있는 저를 간파하였습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몹시 애쓰고 있는 게 역력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그런 것 아닌가 합니다. 너무도 처연해졌지만 그것을 감추려고 저 또한 억지로 웃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슬펐지만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음을 만들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였을 뿐입니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사흘이 지났습니다. 집안 형님 부부가 저희 부부를 불러냈습니다. 달팽이가 되어가고 있는 저에 대한 배려였죠. 아주 좋은 생선회를 대접하셨습니다. 생선회를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저희 부부는 나란히 여의도 성모병원의 응급실에 누워야 했습니다. 감옥 안에서 감옥을 산 저와 감옥 밖에서 감옥을 산 아내가 기름기 많은 생선회 때문에 장에 탈이 난 것입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겨우 두 달도 안되는 기간 동안 먹지 않았을 뿐인데, 생선회 좀 먹었다고 탈이 난다는 것이 말입니다. 결국 그런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제 자신을 비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정도밖에 못되는 주제에 잘난 척, 아는 척이 하늘을 찔렀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장염의 고통이 차라리 통쾌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루 온종일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저를 미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읽다가 멈춘 성경읽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네 번이나 완독한 성경이지만, 여전히 낯설었습니다. 성경은 정말 어려운 책입니다. 읽고 읽고 또 읽어도 생판 처음 보는 것 같은 글이 너무 많이 보이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때, 다섯 번째 완독할 때에는 그 정도가 너무도 심했습니다. 읽다가 성경을 덮어놓고 생각하거나 다시 펴보고 또 반복해서 읽은 적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전에 읽을 적에도 이런 말이 있었나? 그런데 왜 내가 몰랐지? 아니, 그때 나는 무엇을 읽었던 거야?”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제게 있어 성경은 상대적으로 훌륭한 책이었을 뿐입니다. 제가 얼마나 우둔하고 어리석은 인간인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때에라도 ‘오! 하나님!’ 하면서 그 앞에 엎드렸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몰랐습니다. 저는 사람을 향해서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향해서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은 한낱 바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이러한 저를 가만히 놔두지 않으셨지요.
이미 51일 전에도 터졌던 일이 또다시 터졌습니다. 보증사고입니다. 친지들의 요청에 씩씩한 척 나서서 섰던 보증이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했지만, 도끼가 저 혼자서 어떻게 발등을 찍을 수 있겠습니까. 도끼날에 발등을 대준 사람이 잘못이지요. 잠언에도 있지 않습니까. “남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라고요. 제가 보증을 해준 친지가 쫄딱 망하면서 그 빚이 제게로 몰려 왔습니다. 꼼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채의 집도 날아갔습니다. 이때부터 이사가 시작되었습니다. 8년 동안 열두 번이나 이사를 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그 사이사이 가족들이 일시적으로 이산가족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돈이 제대로 맞춰지지 못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50여년 동안 불과 세 번밖에 하지 않았던 이사를 8년에 열두 번이라니…. 과장 없이, 무슨 복수를 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심지어 50년대 중반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도 뉘우쳐졌습니다. 그때 양복에 보타이 맨 학생은 저를 비롯해 불과 몇이었습니다. 이런 제 모습이 다른 아이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까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고무신, 찢어진 운동화가 드물지 않던 때에 제가 신었던 구두 땜에 속상했을 아이들은 또 얼마였을까 반성하였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들이 줄을 잇고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하면서도, 제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어제는 제 이름을 바닥에 팽개치시고, 오늘은 제 물질을 흔적도 없이 날려 보내신 바로 그분, 하나님에 대한 생각 말입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제게 해당하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자꾸만 고통의 황야로만 내달리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속도까지 내면서요.
2010년 6월 30일 김종찬(전 KBS 집중토론 사회자, ‘희망의 소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