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스파이단 체포… 열받은 러 “공개 발표 유감”

입력 2010-06-30 18:48

미국연방수사국(FBI)이 지난 27일 러시아 간첩 혐의자 11명 중 3명을 버지니아주 알링턴가에서 체포했다. 이곳엔 바로 3일 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찾은 단골 햄버거 가게 ‘레이스 헬 버거’가 있다.

이번 사건으로 국제질서의 ‘리셋(reset·컴퓨터를 껐다가 다시 켬)’을 외치며 러시아와 관계 복원을 시도해 온 오바마의 외교정책이 도마에 올랐다.

미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PF)는 30일 뉴스코프 이사이자 스페인 총리를 지낸 호세 마리아 아즈나르의 말을 인용해 “세계는 컴퓨터가 아니기에 리셋 버튼이 없다”며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의 원칙을 수호해온 미국의 리더십을 미 대통령이 저버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즈나르는 “오바마가 당선됐을 때 유럽은 우리와 더 가까운 미국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백악관은 오랜 친구를 저버리고 러시아에만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국장을 지낸 니콜라이 코발로프 국가두마(하원) 의원은 러시아 이타르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내 매파들이 이번 사건으로 러시아에 대한 강경 노선을 끌어내리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드레이 네스테렌코 외교부 대변인도 “왜 미 법무부가 냉전시대에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미국이 스스로 양국 관계 재설정에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발생해 유감”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간첩 혐의자는 조용히 본국으로 추방하는 것이 통례다. 독일 DPA통신은 2001년에도 미국은 외교관 지위를 갖고 활동한 50명의 러시아인을 추방했다고 전했다. FBI는 이번엔 이례적으로 50여쪽의 공소장을 공개했다. 뉴욕포스트 같은 타블로이드 신문은 물론, 워싱턴포스트도 용의자 중 미모의 20대 여성인 안나 채프먼의 사진을 크게 싣고서 “미국 관리와 사업가들을 유혹해 국가기밀을 빼냈다”고 보도했다.

당장 간첩 용의자들에게 지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 대외첩보부(SVR)가 소련시절 국가안보위원회(KGB)의 후신으로 거론되면서 러시아의 냉전적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다. SVR은 러시아의 대외정보 수집기구로 미하일 프라드코프 전 총리가 1만3000명의 직원을 이끌고 있다.

KGB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29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두 나라 사이의 긍정적인 기류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정보요원 체포는 법 집행 문제라고 규정,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비화 가능성을 차단했다.

체포된 러시아 정보요원 중에는 캐나다인이 다수 포함돼 있고, 일부는 영국 아일랜드 등의 위조 여권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련국들도 긴장하고 있다.

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