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러 스파이 11명 체포… 냉전시대 첩보영화 뺨쳤다
입력 2010-06-29 18:16
2004년 어느 날, 뉴욕 번화가 포리스트힐 지역의 한 기차 승강장.
크리스토퍼 멧소스라는 이름의 남자가 오렌지색 가방을 들고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역내 계단을 올라가고 있다. 순간 계단 위쪽에서도 한 남자가 내려온다. 그의 손에도 역시 오렌지색 가방이 들려 있다. 두 사람이 스치면서 가방이 바뀐다. 미 연방수사국(FBI) 감시요원들을 빼고는 누구도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첩보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미 법무부는 29일(현지시간) 다수의 위장 부부가 포함된 러시아 간첩단 11명을 체포해 기소했다고 미 언론이 전했다. FBI 요원들이 이들의 체포 작전을 전격 단행한 시점은 지난 17일. 체포 장소는 뉴욕 중심가, 보스턴, 워싱턴DC 근처의 버지니아주 알링턴 등 평범한 중산층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들을 기소한 영장에 따르면 FBI는 최소 7년 전부터 이들을 정밀감시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보던 냉전시대의 온갖 첩보활동이 다 실행됐다. 이들은 옛 소련의 국가안보위원회(KGB) 후신인 러시아해외정보국(SVR) 소속으로 미국인과 캐나다인 신분으로 위장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의 명의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자식을 입양한 경우도 있다.
스파이들이 다른 러시아인으로부터 활동자금이 든 돈 가방을 전달받기도 했다. 심지어 남미의 한 국가에 가서 활동자금을 받기도 했다. 공원 벤치에서 현금이 든 쇼핑백을 받는 장면도 FBI에 포착됐고, 2명의 스파이는 2006년 6월 지령을 받고 뉴욕 교외의 한적한 곳에서 다른 스파이가 2년 전 땅속에 묻었던 돈다발 봉지를 파내 사용하기도 했다.
스파이들은 무선 전보나 폐지된 인터넷사이트, 특정 주파수에서만 암호를 받을 수 있는 무선장치 등을 활용했다. 텍스트나 이미지, 오디오파일에 비밀 메시지를 숨겨놓는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까지 동원됐다. 이는 육안으로 볼 수 없어 FBI는 특수소프트웨어로 이를 해독했다.
FBI는 이 같은 활동을 모두 인지했다. FBI 요원들은 수년 전 스파이들 집에 도청장치를 했고, 이들이 자주 드나드는 레스토랑, 호텔 등에 비디오카메라까지 설치해 놨다.
FBI가 체포 작전에 나선 건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진 직후였다. 그래서 체포 시점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이 상당히 언짢아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보도했다. FBI 관계자는 더 늦출 경우 일부 혐의자의 도주가 우려됐다고 해명했다. 주미 러시아 대사관 측은 “아는 바 없다”고 일축, 양국 간 냉기류가 흐르고 있다.
워싱턴=김명호 특파원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