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연숙] 수몰되는 강 언덕에서

입력 2010-06-29 17:48


집 앞에서 친구를 잠깐 만나고 들어오니, 피자와 콜라가 있다. 동생이 점심 대신으로 사다 놓은 것이다. 창밖을 보니 비도 그치고, 싸한 비 냄새가 들어온다. 비가 오는 여름날이면 더욱 그리워지는, 기억 속에 담을 수밖에 없는 그곳이 있다.



어릴 적, 방학마다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에 가곤 했다. 한탄강 언덕 위에 있던 시골집 옆에는 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여름이면 그 길을 내려가 얕은 강가에서 멱을 감거나 집에서 조금 떨어진 폭포에서 더위를 피하곤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고 흙탕물과 풀을 조심스레 피해가며 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갔다.

나는 그곳에서 물놀이보다 빗소리를 듣고 비 냄새를 맡으며 한탄강을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다. 강은 뜨거웠던 백사장을 삼키고 온 동네를 삼킬 듯 넘실대며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에는 문득 풍경이 그립고, 강을 내려다보던 언덕이 그립다. 그곳은 얼마 후면 댐으로 변하고 마을과 추억이 깃든 공간이 물속으로 사라진다.

TV에서 물로 인해 일상이 바뀐 충청도의 한 마을을 본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은 마을이 저수지로 변하면서, 오랜 삶의 터전을 떠나 저수지 인근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을 담백하게 그렸었다. 물은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바꾸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유년 시절에 시골집을 떠나야 했기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처지에 대해 잘 모른다. 다만 작은아버지를 통해 물은 저수지의 그 마을처럼 마을 사람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게 했다는 것이고, 댐 건설로 인한 금전적인 보상이 주민들의 사이를 벌어지게 했다는 것이다. 현실적인 상황에 처한 이들과 달리 나는 물이 앗아가는 추억에 미련을 떨고 있다. 물 때문에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기억, 아버지가 젊은 시절 일궈놓으셨던 그 터전이 더욱 아련해졌다.

기억 속에 아버지와 나는 서울 가는 버스 안에 있었고, 버스는 멈춰 있었다. 평생 한복을 입으셨던 할아버지가 창문 너머로 병콜라와 커피껌을 넘겨주셨다. 아버지가 그 물건들을 받아들었고, 버스는 출발했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뒤를 돌아보니, 할아버지가 콜라를 넘겨주던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 때문인 듯, 한동안 콜라와 커피껌에 중독되었다. 문득 이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더니 너무 오래 전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며 고개를 돌리신다. 아버지는 기억이 안타깝다 보니, 애써 외면하고 싶어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가 일구던 땅은 공사를 위해 파헤쳐졌고, 비오는 날 강을 내려다보던 그 언덕은 오래 전부터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곳을 밟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제 생각한다. 콜라와 커피껌, 할아버지 할머니의 추억이 서린 그곳은 잃는 게 아니라고, 물과 함께 계속 흐를 것이라고.

김연숙(출판도시문화재단 기획홍보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