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변재운] 세종시는 ‘庶子’인가

입력 2010-06-28 17:48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국가 시책으로 정해진 이상 성공하도록 최선 다해야”

세종시 수정안 논란이 한창이던 몇 개월 전 각 언론사 논설위원들이 세종시 건설현장을 찾은 적이 있다. 모 기업체 초청으로 다른 행사에 갔다가 귀경길에 들러본 것이다.

안내사무소 옆에 세종시 조감도가 크게 설치돼 있었는데 그게 원안인지 수정안인지 헷갈렸다. 조감도에는 행정부처뿐만 아니라 대학과 연구단지 등 구역별로 입주단체들이 일목요연하게 명시돼 있었기 때문이다. 안내자로부터 원안이라는 답변을 듣고는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물론 조감도는 항상 그럴듯하게 그려지기 마련이다. 행정부처 자리에 기업이 입주하는 등 수정안과는 내용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원안 조감도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세종시가 유령도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기 힘들 듯했다.

6·2 지방선거 이후 세종시 수정안이 사실상 힘을 잃고 폐기수순을 밟으면서 다시 ‘유령도시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송석구 세종시민관합동위원회 민간위원장은 “원안대로 도시를 건설했을 때 1만명 남짓한 공무원 말고는 세종시로 이사 올 분들이 거의 없을 것”, “기업들은 입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등 ‘원안=유령도시’를 기정사실화했다.

삼성과 롯데, 한화, 웅진 등 세종시 투자를 밝혔던 기업들이 입주를 포기할 것이라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수정안은 원형지 공급이나 세제 감면, 규제 완화 등 인센티브가 많고 산업용지만 100만평 넘게 제공되는 만큼 기업에 매력적이지만 원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입주를 검토해 왔던 서울대와 고려대도 원안이 추진될 경우 입장을 전면 재검토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세종시 미래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수정안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특혜조치가 사라진다면 원안은 자족도시로 발전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다가 정말 공무원만 사는 유령도시가 되는 것 아닐까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정부나 여당 일부 의원들의 태도가 마치 유령도시가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비쳐진다는 것이다. 부결되더라도 수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부쳐서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했는지 역사의 기록에 남겨야 한다는 주장에는 원안 세종시가 실패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친이계 모 의원은 “세종시가 유령도시가 되면 민심이 돌아서고 수정안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서 서자(庶子) 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라며 아버지 홍판서에게 설움을 쏟아낸다. 그런데 지금의 세종시가 꼭 그 신세를 닮았다.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해야 할 청와대와 정부, 여당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으니 조선시대 서자 취급보다 나을 게 없다.

하지만 아들이 아버지가 생각한 것과 다른 직업을 갖고,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해서 아들이 잘못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부모가 끝까지 반대한 남자와 결혼했다고 딸이 불행해지기를 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친이계로서는 세종시가 원안으로 추진돼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화가 날 법도 하다. 그 속상함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지만, 그렇다고 세종시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면서 사안에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소통이 어려운 것은 때론 자신의 생각을 접어야 하고, 때론 고이 간직해온 가치관까지 바꿔야 하는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본회의 부의 주장이 최후 순간까지 수정안을 관철시켜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 있겠지만, 여기서 부결된다면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세종시를 MB표 명품도시로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수정안을 밀어붙였듯, 비록 최선책이 아니라 할지라도 주요시책으로 정해진 이상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라도 세종시가 인구 50만 자족도시가 될 수 있도록 가능한 지원책을 강구해야 한다. 실패를 감내하면서 수정안 반대자들을 후회하게 만들기에는 너무 큰 프로젝트 아닌가.

변재운논설위원 jwb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