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은소교회 김성길 목사의 목회 비법
입력 2010-06-28 14:00
[미션라이프]김성길(67) 시은소교회 목사의 인생 스토리를 듣노라면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장식하고 있는 요셉이 생각난다. 요셉은 17세의 나이에 종살이를 시작했으며,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밤마다 눈시울을 붉혔다. 영문도 모르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붙잡았던 요셉은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됐으며, 후손들에게 출애굽의 비전을 제시한다.
김 목사도 1944년 평양의 부유한 집에 태어났다가 6·25전쟁으로 졸지에 고아가 돼 버렸다. 14년간 보육원을 전전했던 그는 목회자의 소명을 받고 수원에서 교회를 개척한 뒤 광교택지 개발지구에 대형교회를 세웠다. 그는 배고픔과 냉대 등 숱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는 말씀만 붙잡고 온갖 인생역경을 극복했다. 김 목사를 만나 그의 인생 속에 개입하셨던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들어봤다.
-6·25전쟁이 목사님을 고아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4대째 신앙 가문에서 자랐습니다. 증조부님은 ‘투전 안하고 술, 바람 안 피는 좋은 교(敎)가 들어왔으니 민족이 살 길은 이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일찍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목사님이셨고 사촌 형님 중 순교자가 계십니다. 4형제 중 둘째였는데 해방 후 시국이 뒤숭숭해지니 ‘가문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선 손자를 분산시켜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6세 때 평안남도에서 목회를 하시던 고모할머니에게 보내졌어요. 그러다 전쟁이 터진 겁니다. 일주일이면 집으로 돌아 갈 줄 알았는데 60년째 못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가족 소식은 모릅니다.”
-보육원 이야기 좀 해 주시죠.
“대구와 경북 경산에 있는 보육원 3곳을 돌아다녔어요. 정확하게 13년 6개월입니다. 현관에 전기난로가 있던 저택에서 살다가 보육원에 가니 눈에나 들어왔겠습니까. 처음엔 식당 냄새가 역겨워 사흘을 굶었어요. 아침은 미국에서 보내온 사료용 보리밥이었고, 저녁은 옥수수 죽이었어요. 점심은 굶었습니다. 소금국에 넣을 시래기가 없을 땐 말려놓은 토끼풀로 국을 끓였어요. 영양실조로 일주일에 한두 명씩 죽어나갔죠. 매도 많이 맞았는데 그 때 세 조각으로 찢어진 귀와 부러진 손가락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어요. 약육강식이 통하는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운동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까.
“그 당시 저는 요셉과 처지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또 성경말씀은 절대 불변의 진리이며 주일 성수와 첫 열매,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면 반드시 복을 주신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처참한 공간이었지만 매일 아침마다 예배를 드린다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만약 졸다가 걸리면 꽝하고 눈에 번갯불이 튈 정도로 박치기를 시킵니다. 예배 후 청소를 하고 나면 일렬로 쭉 서서 세수 검사와 성경 말씀 한 구절씩을 체크했습니다. 그걸 14년간 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그마치 3000구절입니다. 사실 신학은 보육원에서 마친 셈입니다. 부잣집 손자로 있었으면 지금처럼 복을 받지 못했을 거예요.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저에겐 원수이지만 어떻게 보면 요셉 형님 같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목회자가 되기까지 이야기를 해주시죠.
“고교 2학년 때 서원했습니다. 말씀을 보니 창고가 흔들어 넘치도록 복을 주신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부모가 있는 친구들과 달리 창고는 고사하고 창고 터도 없기 때문에 10배는 더 노력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세 때 달랑 2000원을 들고 보육원에서 나와 수면제를 들고 기도원으로 향했습니다. 확실한 응답을 주시지 않으면 죽겠다는 뜻이었죠. 금식 사흘째 되던 날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가 64년 12월 27일이었는데 ‘아들아, 네가 추위에 떨며 혼자 잠들 때도 나는 떠난 적이 없었다. 너는 쇠기둥 같겠고, 네 앞에 있는 시련과 시험은 거대한 쇠기둥 앞에서 부서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5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빡빡머리 소년이 대구 평리동교회 담임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다들 목회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교회건축을 5번이나 하고 성도만 2500명이 넘습니다. 비결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개척할 때 한번도 ‘과연 교회가 부흥할 수 있을까’ 고민한 적이 없어요. 확실한 기도응답을 받고 시작했으니 나무 막대기 두개만 묶어놔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목회자라면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확실한 소명감이 있어야 해요. 확신만 있다면 그 다음은 모두 해결된다고 봐요. 특별히 신유사역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대로 믿고 기도하면 병 낫는 역사가 자주 일어납니다. 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꿈과 환상, 음성으로 주님께서 말씀해 주세요. 사실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 아닙니까. 체험 없이 어떻게 믿겠어요. 현대사회가 최첨단 시대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속은 허해요. 결국은 영성목회 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목회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목회자의 권위는 희생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존경하고 믿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철저히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말이 목회자 세계에 딱 맞다고 생각해요. 자아가 콱 죽어버리면 더 죽을 일도 없지 않습니까. ‘정치’할 에너지가 있으면 목회에 쏟아 부으세요.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그분께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며 사도신경을 외우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믿진 않아요. 또 한 가지 저는 기도응답이 있기 전에는 절대 안 움직입니다. 기도 없이 움직였다간 결국은 내 손해고 교인들까지 다칩니다.”
김 목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힌다. 사소한 일로도 인신공격을 받는 목회자의 세계에선 쉽지 않은 일이다. “나같이 소외된 사람도 하나님이 쓰신다는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망신당해도 좋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수없이 ‘죽어 본’ 목회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국민일보 미션라이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