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보다 더 위대했던 레이커스의 전설 제리 웨스트의 고백

입력 2010-06-27 17:36


[미션라이프]“제리 웨스트가 왔데요!”

지난 22일 서울월드컵경기장 상황실에서 만난 한 청년이 이날 평화기도회에 참석한 귀빈 명단을 보고는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누구냐는 질문에 청년은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에요”라며 속사포로 설명을 이어갔다. 제리 웨스트(72). 미 NBA 농구 로고의 주인공이자 준우승팀에서 MVP 파이널을 거머쥔 농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물. LA레이커스 선수에 감독, 단장까지 연임한 그에게 세상은 ‘전설’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그런 그가 왜 6·25 60주년 기념 기도회에 참석했을까.

25일 오전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만난 웨스트씨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losing loving one)”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그의 형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 형의 나이 21세. 웨스트의 나이 12세때 일이다. “데이비드(David).” 형의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힘겨워보였다. 그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밤마다 형 생각에 잠 못 이룬다고 했다.

웨스트씨는 유진 풍산 그룹 회장의 초청으로 20일 한국에 왔다. DMZ(비무장지대)에도 가보고 평화기도회와 국가조찬기도회에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참석했다. 형이 죽은 나라, 한국에 와보기는 처음이다.

그의 가족은 모두 크리스천이다. 형은 그 중에서도 가장 독실했다. “파병이 결정됐을 때 어머니는 성경을 형에게 선물했지요. 형은 한국에 가는 도중 성경을 잃어버렸어요. 수소문 끝에 서울에서 성경을 다시 찾았답니다. 그 성경을 들고 군으로 돌아간 지 일주일 뒤에 죽었습니다.”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성경이었다. 그 뒤로 웨스트씨의 가족은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토록 좋은 사람을 왜 지켜주지 않으셨는 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상처는 크고 깊었다. 그의 상처를 유진 회장은 알았다.

웨스트씨의 유년시절은 초라했다. 탄광 기술자였던 부친은 고된 일에 지쳐 6남매와 단 한 번 제대로 놀아준 적이 없었다. 그는 둘째 형을 가장 의지했다. 둘째 형이 전쟁으로 죽고 난 뒤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당시 유일하게 즐긴 놀이라곤 농구와 낚시 정도였다.

“지도에 나오지도 않는 작은 마을, 그 곳에서도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났죠. 성격도 소심했어요.”

농구는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키가 작아 농구부에서 벤치로 밀려있던 그는 1년 만에 주전 자리를 꿰찼고, 졸업 무렵엔 60개 대학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다. 대학 졸업반 시절(1960년)엔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냈고, 레이커스 선수 시절엔 ‘미스터 클러치’로 불리며 33연승을 이끌어냈다. 수비와 공격 모두 능한 선수. 이후 단장, 감독, 스카우터로서 이름을 날리는 그에겐 늘 최고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는 하지만 한결 같았다.

“감사하지만 저는 평범(normal)한 사람일 뿐입니다.”

명예와 돈. 이 모든 것이 그에겐 “무의미(meaningless)”하다고 했다.

그는 대신 DMZ에서 만난 소녀들의 미소, 감독시절 선수의 자녀들이 자신에게 보내온 편지, 꼬마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해주는 누군가의 모습을 회상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작지만 소중한 가치. 그는 그런 가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고 했다.

커피숍에서 먼저 의자를 빼준 사람은 웨이터가 아닌 그였고, 말하기보다 듣는 사람이 그였다.

캘리포니아의 노던 트러스트 오픈 대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제리 웨스트. 그는 골프 실력도 좋아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정재계 유명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텁다. 덕분에 자신의 백넘버를 딴 식당 ‘프라임 44’은 지난해 개점이래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그에게 하나님은 어떤 존재일까.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이 매우 영적(spritual)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갑니다.”

교회에 나가지는 않지만 주일 방송 설교도 종종 듣고, 기독교 서적을 다독하며, 목회자와 성도들과 교류하며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웨스트씨.

그는 여생을 베풀면서 살겠노라고 말했다.

“저도 젊은 시절에는 성공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남들과 경쟁에서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습니다. 하지만 제 나이쯤 되면 세상적인 성공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알게 됩니다.”

그는 모교인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에 형의 이름으로 학습관을 기증했고, 자신과 아내 카렌의 이름으로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또 자선골프대회를 열어 수익금으로 소수자와 소외계층을 돕고 있다. ‘다함없이 베풂(giving).' 그의 소명이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