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으로 그려낸 현대인의 삶… 황주리 ‘꽃보다 사람’ 개인전
입력 2010-06-27 17:46
“어느 날 꿈속에서 달나라에 갔다. 달 표면에 내가 그린 해바라기 그림으로 도배를 했다. 외롭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슬슬 사람이 그리워졌다. 아무래도 꽃보다 아름다운 건 사람이라는 생각이 오랜만에 들었다.”
풍부한 상상력과 유머러스한 그림언어로 일상의 이야기들을 화면에 담아내는 작가 황주리는 7월 11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에서 여는 개인전 타이틀을 ‘꽃보다 사람’이라고 정했다. 여행 중에 만난 꽃이나 풍경에 관심을 두었으나 결국에는 자연과 어우러진 사람의 모습이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틈만 나면 여행을 즐기는 작가는 발길 닿는 곳마다 만나는 이미지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는 사진의 생생한 이미지를 캔버스의 배경으로 삼고 그림을 그려넣는 작업에 몰두했다. 현실의 사진 이미지는 연극무대가 되고 그 위에 그려진 그림 이미지는 살아있는 등장인물이 된다.
사진과 그림이 만난 무대의 소품은 실크로드 둔황의 사막처럼 낯선 곳의 풍경뿐 아니라 낯익은 골목길이나 섬 마을 풍경, 어릴 적 초등학교 수돗가에서 틀기만 하면 물이 콸콸 쏟아지던 수도꼭지, 시골길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항아리 등등이다. 이렇게 완성한 일련의 작품을 작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금 이 순간에 관한 회화적 연구’라고 말한다.
작가는 독창적인 형상과 현대적 화풍으로 현대인들 삶의 모습을 제시한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 같은 오브제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그는 이번 전시에서 의자 작품을 처음 선보인다. 오래 전부터 수집해온 꼬마 의자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식물학’ 연작을 그려넣어 전시장에 배치함으로써 어린 시절의 동화 속 추억으로 이끈다.
황주리의 그림 속에는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작은 행복들과 사랑, 탄생, 죽음 같은 삶의 축제들, 그 속에 담긴 예리한 문명비판적 시각과 따뜻한 휴머니즘이 녹아있다. 꽃에 대한 의미를 통해 바라본 사람들의 이야기,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위트있게 풀어낸 작품들이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일깨운다.
그는 해바라기를 좋아한다. “해바라기를 처음 본 건 일본어로 된 고흐의 화집에서였다.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실제 해바라기가 아닌 그림 속의 해바라기다. 왜 나는 실제 꽃보다 그림 속의 꽃을 오래 기억하는 걸까. 그림 속의 꽃은 시들거나 죽지 않기 때문일까.”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꽃,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꽃, 병문안을 갈 때 들고 가는 꽃, 우울한 날에 한 묶음 사서 화병에 꽂아놓는 꽃, 시들지도 죽지도 않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 작가는 “꽃은 사랑과 생명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꽃은 삭막한 현실에다 풀이나 강력 접착제로 정성껏 붙이고 싶은 꿈속의 벽지, 그 꿈속의 벽지가 바로 자신이 그린 꽃 그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 그림 속에서 꽃을 볼 것이다. 백합과 해바라기와 연꽃과 선인장과 이 세상의 모든 이름 모를 꽃들을.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꽃이면서 꽃이 아니다. 서로의 수분과 자양분을 나누며, 혹은 뺏고 빼앗기며 죽어가고 살아남는 우리네 인간의 삶도 이와 닮지 않았을까?”(02-519-080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