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기자의 남아공 편지] 매운 치킨커리 먹으면서 행복했습니다

입력 2010-06-25 18:09

오늘은 가벼운 콩트 하나 들려드릴까 합니다. 제가 이곳 남아공에서 지내는 장면입니다.

저는 지금 남아공 더반 공항 앞 식당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한국-우루과이 16강전이 열릴 포트엘리자베스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 밥(한식과 최대한 가까운) 생각에 이곳에 앉았습니다.

‘피시 마켓(fish market)’이란 식당 간판이 보여 무조건 자리를 잡았습니다. 1개의 스테이크 하우스, 2개의 베이커리, 1개의 햄버거집을 지나친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그래도 여기엔 매운 음식이 있겠지….’

피시 마켓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줬습니다. 일단 커리가 딱 눈에 들어왔습니다. 치킨 커리, 소고기 커리, 해산물 커리 3종류가 있습니다. 미소 한번 지었습니다. 메뉴판 다음 면을 보니 아시안 소스(asian sauce)라고 적힌 음식이 보입니다. 1인분짜리 해산물 음식 위에 아시안 소스를 뿌려준다는 건데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안 맵다(no spicy)”고 합니다.

선택은 자명해졌습니다. 자신 있게 치킨 커리를 주문했습니다. 10분 뒤. 치킨 커리가 담긴 검은색 항아리 종지와 밥 한 공기가 거꾸로 살포시 놓여 있는 흰 접시가 나왔습니다. 김치나 단무지 같은 반찬은 물론 없습니다. 젓가락 없이 숟가락만 내려놓는 종업원 손이 미웠습니다.

비볐습니다. 한 술 먹어봤습니다. “오∼, 이거 꽤 맵네.” 입 밖으로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먹던 커리 맛과 다르지만 행복했습니다. 아까 그 ‘미웠던’ 종업원이 “남은 치킨 커리를 싸줄까?” 하고 묻습니다. “물론”이라고 대답하는 데 1초도 안 걸렸습니다.

지난 5일 남아공에 들어온 뒤로 제대로 된 한식을 먹은 게 한국-아르헨티나전(17일) 이틀 전, 그러니까 거의 열흘 만에 ‘유사(類似) 한식’을 경험했습니다. 남아공에서 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한식도 아르헨티나전이 열린 요하네스버그에 한국 식당이 있어 누린 호사였습니다. 허정무호 캠프인 루스텐버그 등 다른 도시에는 한국 식당이 없습니다.

그래도 전 괜찮습니다. 외국 나오면 누구나 음식 고생을 합니다. 한국이 8강이 아니라 4강까지 가도 견딜 수 있습니다. 두둑한 배를 일으켜 이제 비행기 타러 가겠습니다.

더반 공항=co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