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폐허속 꿈 많던 여섯살 소녀의 성장기… 여성주의 작가 이경자 장편소설 ‘순이’
입력 2010-06-25 17:33
소설가 이경자(62·사진)가 한국전쟁의 상처와 전후의 사회상을 여섯 살 소녀의 성장기를 중심으로 풀어낸 장편소설 ‘순이’(사계절)를 펴냈다.
소설의 무대는 38선 이북의 북한 땅이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구인 강원도 양양이다. 이 곳이 고향으로 전쟁 직후 소설의 주인공 ‘순이’와 비슷한 나이였던 작가는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던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낯설지만 정감이 느껴지는 강원도 사투리를 그대로 살린 소설은 1950년대 풍경을 실감있게 그린다.
순이는 딸이라는 이유로 어머니로부터 괄시와 차별을 받으며 자란다. 어머니는 군복을 수선하는 일로 집안의 살림을 꾸려가는 실질적인 가장이지만 하는 일 없이 밖으로 나도는 아버지에게 수시로 손찌검을 당하는 신세다. 그럴수록 더 악착같이 돈 버는 일에 매달린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걸핏하면 핀잔을 듣고, 며느리에게도 무시를 당한다. 그런 할머니에게 손녀 딸 순이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말동무다.
순이는 동네 친구 분이와 놀려고 하지만 할머니는 내무서에 다니다 북으로 올라간 분이 아버지가 ‘빨갱이’라는 이유로 함께 놀지 말라고 다그친다. 순이는 성당 관사에서 사는 단짝 친구 영이와 어울려 지내며 구호물자로 나온 미제 껌과 크레용에 정신을 빼앗기고, 미국과 천당에 대한 경외감도 키워나간다.
소설은 전쟁 직후의 혼란스럽고 궁핍한 시대상을 그리고 있지만 분위기가 그다지 무겁지 않다. 자연과 이웃을 벗 삼아 살아가는 순이의 일상을 따라가며 전쟁을 통과해 온 사람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거치며 원조를 앞세워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모시켰는지도 보여준다.
작가는 책 서두에 “‘순이’의 마지막 문장을 써놓고 잠깐 손이 멈췄다. ‘끝’자를 써야할까? 의문이 들었다. 내가 울고 싶어야 한다는 느낌이, 마치 타인의 것인양 ‘관찰’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만큼 한국전쟁이 이 땅에 남긴 고통과 전후의 혼란스런 상황에 그대로 내맡겨질 수밖에 없었던 소녀 ‘순이’야말로 작가 자신의 분신인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끝낸 후에도 가슴속에 뭉클하게 남아있는 덩어리를 잊지 못해 한동안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지 못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슬픔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어렵고 어렵다. 그래서 모든 고향으로 난 길섶엔 조목조목 그리움이 손짓하는지 모른다.”
라동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