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365] (土) ‘시간’이라는 열차

입력 2010-06-25 17:39


찬송: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546장(통399)

신앙고백: 사도신경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1절

말씀: 학문의 디지털 시대가 열려 있는 오늘날에는 어느 분야의 학문이든 뛰어들 수 있습니다. 공과대학생이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가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는 것 등이 좋은 실례입니다. 그들이 모두 뛰어난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학문 간 간격이 좁혀졌고 학문의 영역들이 다중 구조화됐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메타사이언스’라는 신조어도 등장했습니다. 예컨대 역사학은 인간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인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인류학도 기원 전 인류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고생물학의 도움이 필요하듯 모든 인접 학문들과 하나가 될 때 참다운 학문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아날로그식 학문 간의 칸막이는 더 이상 의미 없다고 하겠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됩니까?’ 교수님의 질문에 한 학생이 답변하기를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됩니다.’ 같은 질문에 또 다른 학생이 전혀 다른 답변을 합니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옵니다.’ 모두 정답입니다. 다만 이성적 답변을 기대했느냐, 감성적 답변을 유도했느냐에 따라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의 정신은 이성과 감성의 복합구조이기 때문에 정답은 둘일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이어령 교수의 말처럼 이 시대는 컴퓨터가 주류를 이루는 디지털 시대이기는 하지만 인간적 감성을 중시하는 아날로그가 꼭 필요한 ‘디지로그’ 시대입니다. 이 역시 합하여 하나를 이룬다는 ‘무경계’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베르디라는 오페라 극작가는 창작극의 시연을 보고 난 뒤 인간의 본질적 한계를 탄식하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인간은 절반은 신이고, 절반은 흙이로다. 절반은 흙이기 때문에 하늘 높이 오르려 해도 흙이라 날 수 없고, 차라리 포기하고 땅에 묻히려 해도 나머지 절반은 신의 모습을 한 영혼이라 묻을 수 없구나. 날 수도 없고 묻힐 수도 없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 그저 인간일 뿐이로구나!”

이처럼 인간은 ‘더 이상의 아래’, ‘더 이하의 위’에서만 엉켜 살아야 하는 존재들, 나눌 수 없는 영혼과 흙으로 이루어진 결합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인간은 무엇으로부턴가 제한된 자유와 선택 안에서 본인의 의지대로가 아닌 타자의 의지에 이끌려 정해진 출구를 향해 가는 ‘시간’이라는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학문 자체의 경계가 없어지듯 영과 육체로 이뤄진 인간도 ‘인간의 경계’를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 이제는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와 있다”는 폴 데이비스 박사의 고백처럼 이미 학문 자체에서 그런 조짐이 보입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찰스 타운의 생각대로 정교한 법칙과 경계가 있는 우주를 창조한, 실재해야 하는 그 초월적인 지적 존재는 누구이겠습니까.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이제 그분께서 디지로그가 끌고 가는 ‘시간’이라는 열차를 멈추어 세울 것이고, 승객들은 하차해 인간의 경계를 벗어나 영원의 처소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살아가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기도: 시간이라는 열차가 설 때 인간의 경계를 벗어나게 하소서

주기도문

장현승 목사(과천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