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0주년… 분열·상처 딛고 민족의 앞날 밝힌다

입력 2010-06-24 09:18


역사란 반복되는 것일까. 60년 전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을 당시 한국교회의 모습은 지금과 비슷한 점이 많다. 광복 이후 교회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신사참배 여부, 교권 문제로 분열을 거듭했듯 2010년 교회도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유치를 두고 진보와 보수가 갈라져 있으며,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선거를 두고 지리멸렬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60년 전 교회의 상황을 되돌아보고 오늘의 한국교회가 걸어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 본다.

◇60년 전 분열과 대립, 전쟁=1950년 초 한국교회는 12만∼15만명의 성도와 900여명의 목회자, 2000여개의 교회가 있었다. ‘1200만 성도, 10만 목회자, 5만 교회’의 지금과는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해방 이후 남한교회는 신사참배 회개 문제로 장로교와 감리교 모두 심각하게 대립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옥고를 치렀던 목회자들이 일제의 강압에 굴종했던 목회자들에게 회개와 자숙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이 문제로 장로교단 내에서 51년 고신파가 분리되고 전쟁 막바지인 53년 기장이 신학사상 문제로 별도의 총회를 구성했다. 한국전쟁과 교회 분열이 똑같은 역사의 궤적을 그은 셈이다.

민족상잔의 비극은 기독교인의 3분의 2 이상이 거주하던 북한교회에 더 컸다. 북한정권은 주일을 선거일로 잡거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릴 예정이던 3·1운동 기념예배를 인민위원회 기념행사로 둔갑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교인들은 이북5도연합노회를 만들어 대응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선 정치 수행에 교회가 방해된다고 판단, 무차별적 박해에 나섰다. 교인은 현격하게 감소했고, 많은 목회자들은 체포돼 순교하거나 행방불명됐다. 남한의 교회도 장로교 541개, 감리교 239개, 성결교 106개, 구세군 4개 등이 파괴됐으며, 240여명이 납치 또는 순교당했다.

◇희망의 한국교회=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는 희망이다. 당시 교회는 구제와 구호사업으로 희망을 잃은 민중을 보살폈다. 한국교회도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외국 교회의 원조로 의료와 교육,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운영해 한국 사회복지의 핵심을 차지했다.

당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교회였다. 전후 미국의 보브 피어스 박사에 의해 선명회가 설립됐으며, 미국교회의 원조로 1600명의 어린이를 돕고 매년 3000명씩 구호사업을 했다. 기독교세계봉사회는 1년에 5000명씩의 폐결핵 환자를 돌봤다. 57년 당시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은 560개, 양로원은 70개, 모자원이 70개였다. 특히 전쟁고아를 돌보는 일에는 기독교세계봉사회와 기독교아동복리회, 홀트아동복지회 등 694개에 이르는 기독교 기관의 공헌이 컸다. 영락교회의 사례처럼 교회는 선교사들이 보내온 구호물품을 나눠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박종화 경동교회 목사는 “한국교회는 독일교회처럼 히틀러에 무릎 꿇었던 지난날을 회개하며 만든 슈투트가르트 죄책선언문처럼 ‘우리’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미래지향적인 제안을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크다”면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서로를 정죄하기보단 6·25전쟁은 등에 업고 가슴으론 평화를 끌어안아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또 “이젠 찬반이라는 구시대적 모양에서 벗어나 진보와 보수가 하나 돼 세계선교의 주체로 나서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