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김명호] 위기, 골프, 여유

입력 2010-06-24 18:09


멕시코만 원유 유출로 시커멓게 돼버린 해안가가 비쳐진다. 바다 위에는 모든 생명을 잡아먹을 듯한 기름이 띠를 이루고 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환경재앙이라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음성이 나온다. 갑자기 화면이 바뀐다.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오바마의 골프라운딩 사진이 계속 펼쳐진다.

공화당이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16일부터 내보낸 1분 26초짜리 오바마 비디오 영상물이다. 최악의 환경참사에도 주말 골프라운딩에 여념이 없는 오바마에 대한 비난이다.

화면엔 ‘DAY-4’와 ‘ROUND 1’이 큼지막하게 나온다. 원유 유출사태가 시작된 지 4일 만에 첫 골프를 치러 갔다는 뜻이다. 공화당 최고지도부인 전국위원회 의장 마이클 스틸은 동영상과 함께 내보낸 글에서 “대통령이 환경 대재앙이라고 규정하면서 BP(브리티시 페트롤리엄) 최고경영진을 만난 건 사태 발생 58일 만이다. 그는 그동안 골프 6번, 가족휴가 2번, 정치모금행사 4번, 그리고 백악관 콘서트까지 열었다. 그래서 그의 스케줄에는 (BP 경영진을 만날) 여유가 없었다”고 신랄히 비꼬았다.

이 동영상은 지난 6일 백악관에서 열린 비틀스 전 멤버 폴 매카트니의 거슈인상(미 의회도서관 주관) 수상 기념콘서트에서 오바마가 흥겹게 ‘헤이 주드’(Hey Jude)를 부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쯤 되면 우리네 정서로는 당연히 언론과 여론의 대대적인 비판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워싱턴 분위기는 전혀 아니다. 동영상이 나온 뒤인 지난 19일에도 오바마는 골프를 즐겼다. 그래도 공화당 내 어떤 의원도 오바마의 골프를 정색하고 비난하지 않았다. 주류 신문이나 방송도 거의 이 문제를 안 다뤘다.

지난주 골프라운딩은 취임 후 39번째였다. 취임 후 평균 2주에 한 번씩 라운딩한 셈이다. 그런데 쉬쉬해가며 라운딩하는 게 아니다. 백악관 출입기자들은 당번제(pool)로 오바마가 가는 워싱턴DC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 골프장까지 반드시 따라간다. 오바마의 스윙 모습까지는 보지 못하지만 5시간여 동안 클럽하우스에서 대기한다. 그래서 오바마가 몇 타 쳤는지, 내기를 했는지를 다 안다. 출입기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주말 골프장 뻗치기’에 걸렸는지를 놓고 가벼운 농담이 오가곤 한다.

오바마가 가족휴가를 가든, 갑자기 막내딸의 축구경기를 응원하러 가든, 조지타운대 농구경기를 관전하러 가든, 점심 때 햄버거를 먹으러 가든, 그가 백악관 바깥으로 나가면 풀기자는 무조건 따라간다. 이건 깨지지 않는 철칙이다. 따라서 오바마의 개인적 외부 생활이나 휴식은 100% 기자들에게 노출돼 있다. 개인생활이 가끔 구설에 오르는 경우는 있지만 정색하는 비판은 받은 적이 없다. 백악관 부대변인은 공화당 동영상에 대한 질문에 “대통령이 휴식으로 머리를 깨끗이 할 시간을 갖는 걸 반대하는 미국인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일축한다.

긴장이나 위기 상황에서 여유로움과 휴식은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올바른 판단에 도움이 된다는 정치사회학자들의 의견이 있다. 집단사고(Group Think) 위험성을 줄여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빙 재니스 예일대 교수가 제시한 집단사고는 응집력이 강한 구성원들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는 경향을 말한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반대를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나친 자부심이나 다양한 의견을 무시하는 좁은 시야 등이 그릇된 결정을 하게 한다. 휴식이나 여유는 이런 오류를 줄여준다는 것이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하게끔 만들기 때문이다.

세종시나 4대강, 천안함 등의 이슈를 다루는 우리 정치권 모습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청와대든, 모두 집단사고에 갇힌 사람들끼리의 대결처럼 보인다. 눈에 핏발이 선 정치인들, 정말 휴식과 여유로움이 필요해 보인다. 워싱턴은 요즘 며칠째 폭염경보가 발령 중이다. 그래도 오바마는 26일이나 7월 3일에 40번째 라운딩에 나갈 것이다.

워싱턴=김명호 mho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