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성혜영] 경기장 밖의 어머니
입력 2010-06-24 18:01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 시상대에 올랐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황홀한 승리에 얼마나 뭉클했던가. 그러나 겨우 스무 살 남짓, 그 여린 어깨들 위에 얹힌 짐이 너무 무거워 보여 저릿하기도 했다. 일본에 살면서 자연히 보게 된 아사다 마오 선수의 좌절과 재기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향도 있었고, 돌연 어머니를 잃은 조애니 로셰트 선수에 대한 안쓰러움도 한몫 했을 것이다. 국경을 넘어서, 그 또래의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말이다.
TV로 경기를 보는데 꼭 심장마비에 걸릴 것만 같았다. “딸들아, 너희들은 절대로 세계 제일 같은 걸랑 꿈도 꾸지 마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했을 정도로, 로셰트 어머니의 횡사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설거지라도 하며 딴청을 피워야 할 만큼 소심 체질인 나로서는 김연아 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선수와 그 어머니들이 존경을 넘어 거의 숭배의 대상이다.
요즈음 밤잠을 설치게 하는 월드컵축구가 씩씩한 사나이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어느 광고 문구처럼, 어머니들에게 그들은 언제나 아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월드컵과는 유난히 인연이 없다는 이동국 선수의 행보에 먼저 주목한 것은 몇 년 전 우연히 한 상점에서 마주쳤던 기억 때문인지 모르겠다. 독일 월드컵을 스탠드에서 관람할 수밖에 없었던 그였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라운드를 포효하는 ‘라이언 킹’으로 남아 있던 때였다. 그런데 가까이서 본 그는 전사가 아니라 수줍은 소년 같았다. 이번 월드컵에도 잠깐 얼굴을 비치기는 했지만 또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등이라도 한 번 두들겨 줄 걸 그랬나 싶었던 그 짧은 스침이 자꾸만 떠오른다.
누구보다도 정대세 선수와 그의 어머니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눈물, 열정과 투지, 그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신세대다운 솔직함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국적이 어디든, 어느 나라 대표로 뛰든, 그 어머니의 선택(?)은 조국이나 이념이 아니라 순전히 아들의 꿈과 행복을 위해서였으리라는 게 거의 확신에 가까운 내 생각이다. 그래서 그의 비극만이 아닌, 쉬 걷힐 것 같지 않는 역사의 그림자가 새삼 아프고 또 두렵다.
아, 그리고 박주영, 박지성, 이정수, 차두리, 김남일, 정성룡…. 한 고비 넘었나 싶으면 다시 예기치 못한 깊은 골을 만나는 게 어디 축구만의 이야기이겠는가. 멀고 험한 길, 그 길 위에서 몇 번 씩 실수하고 넘어질 테지만, 그때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면 그게 진정한 승리가 아닐까. 꿈은 언제나 끝나지 않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진부하고 진부한 말을 지껄일 수밖에 없는 나는, 내 아이가 이 가혹한 전장에 있지 않다는 것에 안도하는, 소심하고 비겁한 엄마다. 그러나 나 대신 싸워주고, 나 대신 울어 주고, 나 대신 다시 일어서서 두 주먹 불끈 쥐어주는 그대들의 꿈과 투지에, 그대들보다 더 강한 어머니들께 6월의 태양만큼이나 뜨거운 성원과 경의를 보낸다. 파이팅!
성혜영(박물관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