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19) ‘질곡의 삶’ 아버지는 어머니께 미안하다는 말씀 남기고…
입력 2010-06-24 17:39
우리 부부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첫 아들 건우는 매우 건강했다. 유학을 마치고 KAIST에 정착하자 부모님도 대전으로 내려오셨다. 나는 가끔씩 점심시간에 유성의 재래시장에서 아버지와 만나 삼계탕이나 보리비빔밥을 먹었다.
얼마 동안은 묵묵히 먹기만 했다. 그 험난했던 세월을 지나는 동안 아버지의 얼굴은 주름으로 고랑을 이뤘으며 머리는 하얀 눈밭이 돼버렸다. 나는 예수님께 이 불쌍한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했다. “많이 드셔유. 아버지, 건우가 아버지를 많이 닮아서 참 좋아유. 손주 장가갈 때까지 건강하게 사세유.”
아버지는 창 밖을 보시면서 딴청을 피우셨다. “나는 니가 법대에 갔으면 했었다. 물론 들어갔더라도 판검사는 꿈도 꾸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간 너의 둘째 큰 아버지 때문이지.”
난 그제야 아버지가 순경이 다녀간 날이면 왜 술주정이 더욱 심해졌는가를 알게 됐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9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 중 몇은 일찍 돌아가시고 대부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일제 징용과 한국전쟁, 월남파병 등 이 땅의 역사의 질곡을 차례대로 모두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 무거운 형제들의 짐을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지고 계셨다. 아버지는 1987년 어머니와 내가 살고 있는 신림동으로 올라오셨다. 관악산 앞에서 낮에는 부채와 뻥튀기를 팔았다. 밤에는 동네 골목에서 붕어빵을 만들었다. 내가 대학기독인회(ESF) 형제들과 모임을 마치고 집에 갈 때면 형제들을 불러 항상 뻥튀기 과자를 그들에게 주시곤 했다. 관악구청에서 노점상 단속을 할 때면 아버지는 물건과 리어카를 빼앗기고 돌아오시곤 했다.
예전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족의 생사가 걸린 리어카를 용케도 잘 찾아오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측은하고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평생을 맨몸으로 자식들 뒷바라지하려 땅을 파고, 막노동을 하며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셨을 나의 아버지…. 대학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안 후부터 나는 부모님의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다.
아버지는 결국 세월을 이지기 못하고 2006년 10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임종하시기까지 두 달간 대전의 누나와 나는 열성을 다해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니 엄마한테 정말로 미안하구먼.” 마침내 아버지도 영적인 눈을 뜨셨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날 요양원에 있는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편안한 미소를 남기셨다. 20여 년간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던 응답을 이렇게 극적으로 들어주셨다.
오랜만에 돌아온 관악캠퍼스는 평화로워보였다. 하지만 후배들은 여전히 좌충우돌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미래와 이룬 것이 없는 현재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던 대학 1학년 때 대학기독인회(ESF)를 통해 나에게 생명의 빛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은 80년대에나 2000년도에도 쉼 없이 역사하시고 계셨다.
나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하는 학문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기를 당부했다. 나는 그들의 방향성 없는 삶을 우주의 핵심인 창조주에게 돌릴 수 있도록 무던히 애썼다. 또한 상대적이며 가변적인 하루살이 학설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와 힘으로 지식인의 삶에 중심을 잡고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진정한 지성인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