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고세욱] 정대세와 차범근

입력 2010-06-23 18:58


국민의 밤샘 염원이 헛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23일 새벽 나이지리아와 비김으로써 극적으로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4강 신화를 이룩한 2002 한일월드컵과 달리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없는 원정에서의 16강 진출은 그 값어치가 결코 작지 않다. 국민에게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월드컵이 됐다.

치열한 축구전쟁만큼 화제가 된 것은 경기장 밖에서도 있었다. 바로 남아공 현지에서 남과 북이 주고받은 훈훈한 메시지였다. 천안함 사건 이후 극도의 남북 갈등 속에서 열린 월드컵이어서 우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남북 축구인들은 서로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잃지 않았다. 특히 북한의 정대세, 방송 해설위원 차범근씨가 상대방에게 보여준 진솔한 애정과 관심은 단연 눈길을 끌었다.

정대세는 한국 국적의 북한 선수라는 이색 이력으로 월드컵 전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원더걸스를 좋아하고 한국 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발언에서 보듯 그의 한국에 대한 애정은 일반 한류팬을 능가한다.

남아공에서는 아예 한국팀 도우미를 자처했다. 정대세는 우리와 같은 조 상대인 그리스, 나이지리아와 평가전을 치른 뒤 한국에 끊임없이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한국은 빠른 팀이니까 수비를 흔들 경우 그리스를 제압할 수 있다.” “우리는 역습밖에 없지만 한국은 전술이 좋아 나이지리아를 이길 수 있다.” 그의 말은 결국 현실이 됐다. 아르헨티나 전을 앞두고도 “불가능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며 격려했다. “박지성과 유니폼을 바꾸고 싶었지만 북한 유니폼이 모자랄까봐 바꾸지 못했다”는 현지 인터뷰도 화제였다.

정대세의 말에 맞장구라도 쳐주고 싶었던 걸까. 차범근 위원은 남아공에서 정대세와 북한팀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보여줬다.

한 축구팬이 차 위원의 미투데이에 이런 질문을 남겼다. “천안함 사태 때문에 분위기가 그런데요, 북한과 브라질 경기 해설 때 북한을 응원하실 건가요?” 차 위원은 “안영학이나 정대세는 우리 선수들만큼 애정이 가. 근데 북한선수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해설을 하면 안 된다고 하네. 너무 고민이 돼 한국에 있는 사람들 한 스무 명한테 문자로 물어봤어. 두 명 빼고는 그게(북한응원)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해”라고 답했다.

정대세와의 에피소드도 밝혔다. “월드컵 전에 정대세랑 지성이를 함께 찍은 CF가 있었어. 내가 내레이션을 하는 건데 생각만 해도 멋있지 않아? 근데 천안함 터지면서 국민정서에 안 맞는다고 바로 없는 걸로 해버렸지. 지금 생각해봐도 멋있는 CF 한 편이 될 뻔했는데.” 차 위원의 글은 수많은 트위터리안이 퍼가면서 화제의 글로 회자됐다.

천안함 사건 이후 북한과 북한인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게 됐다. 월드컵에서의 남북공동응원도 그래서 물 건너갔다. 이런 상황에서 정대세와 차 위원의 멘트와 진솔한 감정들은 신선하기까지 하다. 남아공 현장에서만큼은 남북 긴장이 설자리를 잃은 모양새다.

나비효과로 봐야 할까. 남아공에서 불어온 이들의 정감어린 언행은 이념에 따른 반목이 심한 한국에도 조용한 반향을 일으켰다. 21일 서울에서는 북한과 포르투갈 경기에 맞춰 작은 북한 응원전이 열렸다. 북 정권에 응어리가 맺혀졌을 탈북자들도 응원에 나섰다.

정대세가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서 국가를 들으며 하염없이 울자 많은 네티즌들은 ‘북한의 월드컵 선전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정대세의 눈물이 천안함 정국을 녹일 기세’라는 격려 댓글로 화답했다.

물론 “정대세의 눈물은 빨갱이 선전용”(yes***) “차범근도 국가관이 없는 하류인생”(sora***)이라고 폄훼하는 네티즌들도 없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남북관계가 다시 정상화돼야 한다면 정대세의 눈물이나 차 위원의 솔직함을 반기는 것에 거부감을 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보다 피를 진하다고 보는 것은 인간의 본능 아닌가. 북한이 예선 탈락하면서 현지에서 정대세의 남한 응원메시지를 더는 듣기 어려워졌다. 그래도 차범근과 정대세가 있었기에 경기 시청 못잖은 즐거움을 이번 월드컵에서 누릴 수 있었다.

고세욱 인터넷뉴스부 차장 swk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