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인강 (18) 완강할 것만 같았던 장인·장모는 선뜻 결혼 허락을…

입력 2010-06-23 21:29


미국과 독일, 프랑스, 인도 등을 오가며 공부한 6년 동안 수많은 크리스천 석학을 만났다. 그들로부터 학문을 연구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웠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지만 수학은 성경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속에는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 이성에 숨겨놓으신 그의 보편적인 창조와 운행의 비밀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유학생활 마지막해 대부분을 버클리, 프린스턴대 한국기독학생회(IVF) 회원들과 보냈다. 우리는 집을 돌아가며 소그룹으로 성경 공부를 하고 금요일에는 함께 채플을 드렸다. 우리집에서 모일 때는 재스민 차와 블랙베리 차밖에 없었지만 성경을 주제로 열심히 토론하고 찬양했다.

나의 신앙생활이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 되어서야 예수님의 멍에가 가볍게 느껴짐을 깨달았다. 무엇이든 기쁨 없이는 율법적이고 수동적이며 결국은 생명력을 잃은 박제된 신앙만 남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외환위기가 찾아온 1996년 가을에 귀국해 이듬해 KAIST에 가게 되었다. 올 봄 하늘나라로 가신 명효철 원장님을 잊을 수 없다. 명 원장님은 기초과학, 특히 고등과학원 설립에 다리를 놓으신 학자로 한국의 과학사에 영원히 기억될 위대한 분이다. 한때 KAIST란 제목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었다. 마치 KAIST가 천재들의 학교로 인구에 회자됐었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 위주로 특수학교에서 훈련을 받아 그랬는지 대부분 학생들이 총명했지만 고집이 세고 자존심도 강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학교는 아니었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싫었다. 그래서 ‘수학과 음악의 밤’이라는 행사를 열어 학생들과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연주회를 개최했다. 교수님들을 초청해 기타 독주도 하고 악기를 다루지 못하는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다. 이곳에도 기독단체 모임이 있었다. 가끔 그곳 예배에서 설교를 해야 했다. 듣는 입장에서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긴 했지만 나를 추스르고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빈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없었기에 집 근처 새누리교회에 출석했다. 안이숙 사모님과 김동명 목사님이 세우신 침례교회로, 자신들이 가진 생각을 구체적으로 살려내려고 노력하는 교회였다. 어떤 사람들은 교도소 선교도 하고, 집 없는 아이들을 2주에 한 번씩 자기 집에 데려와 하루씩 같이 지내며 그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새로 온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잘 가르쳐 주었다. 복음의 능력이 말에 있지 아니하고 행함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는 교회였다.

신앙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속도 모르고 주변에선 빨리 결혼하라고 성화였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을 믿고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여기까지 서느라 고생 많았네. 예수 잘 믿고, 사랑하는 우리 희령이와 행복하게 살게나.” 처음 상견례를 할 땐 참 난감했었다. 두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에게 시집 가겠다는 딸이 곱게 보일 리 없었을 텐데 장인과 장모 되실 분들은 우리의 결혼을 쾌히 승낙해 주셨다. 난 수없이 많은 예상 답변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모두 빗나갔다. 첫 대면에 허락해 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집안과 학벌, 외모 등을 고려해 결혼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정말로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침내 98년 2월 우리는 5년간 편지 사랑의 꽃을 피웠다. 2002년 첫아들 건우를 낳은 아내가 한없이 울기만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정리=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