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녹산등대 가는 길… 어야디야∼ 뱃노래 저절로 흥얼흥얼

입력 2010-06-23 17:30


‘바닷물에 주기(酒氣)가 있었나보다 / 나 술밭(酒田)에 누워 있을 테니 / 깨우지 말라 / 일으켜 세우지도 말고 / 묻(埋)지도 말라 / 주기가 있었나보다’

전국의 섬을 주유하던 이생진 시인은 10여 년 전에 거문도를 찾았다. 거문도등대를 비롯해 거문도의 구석구석을 시로 기록하던 시인은 ‘녹산등대로 가는 길’에서 아예 취한 듯 갯쑥부쟁이꽃 옆에 누웠다. 그리고 ‘녹산등대로 가는 길’을 주제로 5편의 시를 남겼다. ‘거문도등대로 가는 길’에서 ‘너무 행복해서 죄스럽다’던 시인은 이곳에서 ‘등대를 찾는 사람은 등대같이 외로운 사람이다’며 한껏 고독을 즐겼다.

녹산등대로 가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늘 외롭고 고독하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거문도 땅을 밟지만 애써 녹산등대로 가는 길을 찾는 이는 드물다. 거문도등대와 백도 등 가슴에 새기고픈 관광지가 많은 탓도 있지만 녹산등대까지 6∼7㎞ 거리를 터벅터벅 걷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녹산등대는 서도, 동도, 고도 등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거문도에서 가장 큰 섬인 서도의 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무인등대. 1958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손죽도, 초도, 장도 등 다도해에 흩뿌려진 수많은 섬 사이를 항해하는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숙명처럼 수행하고 있다.

고도의 거문도여객선터미널에서 고도와 서도를 연결하는 삼호교를 건너면 불탄봉 아래에 위치한 덕촌마을.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공덕비 하나가 눈길을 끈다. 거문도 서도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창기 해군 육성에 공헌한 고 박옥규 제독의 송덕비이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1885년에 거문도를 무단 점령한 영국군에 의해 해밀턴항으로 명명된 거문도에서 대한민국 제2대 해군참모총장이 나왔다는 사실이 이곳 주민들에게는 큰 자랑이리라.

덕촌마을은 거문도 서도 트레킹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거문도내연발전소 옆 등산로를 오르면 불이 자주 나는 산이라는 뜻의 불탄봉이 지척이다. 해발 195m 높이의 불탄봉은 아담한 야산. 정상에 서면 초록 융단처럼 펼쳐지는 동백숲 너머로 고도, 동도, 초도, 손죽도, 백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수평선을 향해 사방팔방 징검다리처럼 이어진다.

서도, 동도, 그리고 고도에 둘러싸인 100여만평의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여객선과 유람선이 중저음 뱃고동을 울리면 거울처럼 잔잔한 에메랄드빛 바다에 잔잔한 물결이 생겨났다 스러진다. 덕분에 갈라지고 패인 시멘트 길도 이곳에서는 거친 질감의 유화 속을 걷는 느낌이다. 음달산 아래에 위치한 변촌마을을 지나 한참을 걸으면 녹산등대 초입에 위치한 서도마을.

일본인들이 고도에 정착하기 전까지 가장 큰 마을이었던 서도마을에는 거문도뱃노래전수관이 있다. 거문도 뱃노래는 어민들이 고기를 잡으며 부르던 노동요. 북, 장구, 괭가리 반주에 맞춰 선소리꾼이 ‘어야디야 어야디야’ 소리를 메기면 다른 뱃사람들이 뒷소리를 받는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된 거문도뱃노래는 테너 박인수가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돌담이 정겨운 서도마을은 전형적인 어촌. 돌담에 둘러싸인 밭에서 쑥을 캐는 아낙들이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처럼 평화롭다. 거문도 쑥은 해풍을 맞고 자라 향이 강하고 품질이 뛰어나 비싼 값에 팔리는 거문도 특산물. 마을 양쪽이 바다인 서도마을 뒤쪽에는 비밀의 화원처럼 아담한 해수욕장도 있다.

고샅길에서 까치발로 돌담 너머 이웃과 정담을 나누는 마을을 빠져나오면 거문초교 서도분교 운동장 옆으로 녹산등대 가는 길이 펼쳐진다. 올해로 개교 105주년을 맞은 서도분교에서 녹산등대까지는 약 1㎞. 인동초가 피어있는 오르막을 넘자 멀리 녹산등대가 고기잡이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는 지어미처럼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다.

거문도는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인어의 전설이 전해오는 섬.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날씨가 흐린 날엔 어김없이 머리를 풀어헤친 하얀 피부의 여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여인의 하체는 물고기 모양이지만 상체는 사람으로 달빛 쏟아지는 날에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섬사람들은 이 인어를 ‘신지끼’ ‘신지께’ ‘흔지끼’ 등으로 불렀다. 신지끼가 절벽에 돌을 던지거나 소리를 내면 어김없이 큰 풍랑이 일어나 거문도사람들은 신지끼를 풍랑을 알려주는 수호신으로 여겨왔다. 하얀 피부의 녹산등대는 인어가 나타났다는 녹산곶 그 절벽 위에서 마치 신지끼처럼 여행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녹산등대 가는 길은 거문도등대 가는 길과 사뭇 느낌이 다르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동백터널을 통과해야 하는 거문도등대 가는 길이 남성적이라면 옷고름을 풀어 헤친 듯 봉긋봉긋한 초원을 가로지르는 녹산등대 가는 길은 여성적이다. 길은 흑염소가 뛰어노는 초원을 가로지르고 새로 단장한 나무데크를 걸어 등대가 서 있는 녹산곶을 오른다.

거문도사람들은 흔히 서도를 사슴의 암컷, 동도를 사슴의 수컷, 그리고 고도를 사슴새끼에 비유한다. 그 중에서도 서도의 녹산은 사슴의 머리부분에 해당하고 그 정수리에 녹산등대가 서있다. 등대 아래에는 고사목 수십 그루가 이색적인 풍경을 그린다. 태풍 ‘매미’가 몰고 온 산더미 같은 바닷물의 염분 때문에 고사한 것이다.

여느 등대처럼 녹산등대도 전망이 좋다. 남쪽으로 거문도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옅은 해무 속에서 나신을 슬쩍 슬쩍 보여준다. 시인은 저 초원 어디쯤 누워 이 등대를 바라보았을까. 하얀 인어의 전설을 간직한 녹산등대가 푸른 하늘 아래서 외로움에 한껏 몸을 떨고 있다.

거문도(여수)=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